▲ 김재성 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한국 YMCA가 ‘N번방’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여성과 아동·청소년 등 상대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인권침해를 오락과 유희, 자기 이익의 제물로 삼는 일탈적 문화의 확산이다.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사건이 아니다. 기생관광, 성매매 집결촌, 버디버디와 소라넷, 버닝썬, 웰컴투비디오 등으로 이어진 연장선상에 있다.>

맞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심층에는 우리사회의 삐뚤어진 성의식과 여성비하의식이 깔려있다.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만 보는 데서 오는 일탈적 문화는 그 연원이 희랍신화로부터 비롯되지만 이번 사건은 한국사회의 천박한 물신주의와 편리성이 극대화된 디지털 문명이 결합한 특이 케이스다.

“얘(피해자)는 나에게 약점이 잡혔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니 가지고 놀아도 된다”며 ‘N번방’ 운영자 일명 박사 조주빈 씨(25)가 처음 들어온 가입자(고객)를 안심시켰다는 이 말에 범죄수법의 사악함,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결코 흐지부지 넘겨서는 안 되는 심각성이 들어있다. 뭘 어떻게 했기에 신고를 못한다고 장담할까? 반신반의하던 가입자는 잠시 후 자기 몸에 ‘나는 박사의 노예다’라고 새긴 소녀가 등장하는 영상물을 보는 순간 그 말뜻을 실감한다. 그리고 안심한다.

좋은 조건의 알바라는 미끼에 걸려들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꼼짝없이 노예가 된 소녀의 알몸 퍼포먼스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가입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수요가 공급을 낳는다. 제3자가 보면 구토가 날 것 같은 엽기적 포르노를 보는 것으로 지배본능의 만족을 찾는 호색한들이 있기에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급이 발생한다.

‘얘는 신고하지 못한다’는 말 속에 함축된 우리사회의 실상도 소름 끼친다. 비밀이 보장되는 커튼 뒤에서 색한으로 변하는 사람이 한둘이라면 별종으로 치부할 수 있다. 농도의 등급에 따라 최고 200만 원의 가입비를 내고 들어온 사람이 20여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커튼 밖에서는 멀쩡한 남편, 멀쩡한 동료직원인 것이다. ‘N번방’을 운영한 조주빈 일당만이 악마가 아니라는 뜻이다.

호색한일수록 사실은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라는 역설이 있다. 여성을 대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자발적 복종에 만족을 느끼는 부류라는 말이다. 그 쾌감을 얻기 위해 기 십만 원에서 기 백만 원의 입회비를 아까워하지 않는 남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돈을 지불하고 산 여자에게서 확인하는 용렬한 사람들이다.

인간세계가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젠더질서의 오묘한 이치 속에 우발적 성범죄 가능성은 상존한다. 다만 그 경우 개인의 일탈이어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愼獨)’는 수신(修身)의 강화 외에 달리 묘안이 없다.

문제는 ‘여자는 돈과 권력과 완력에 굴종한다’는 여성 혐오성 믿음에서 나오는 일탈적 문화현상이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현상은 자연적인 것도 본능적인 것도 아니고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1955년 7월 130여명의 여성을 혼인빙자 수법으로 농락해 놓고 “내가 관계한 여자 중 처녀는 한 명밖에 없었다”고 뻔뻔스럽게 말한 박인수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선고이유가 한동안 회자되었다.

50년대 성의식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가할 2차 피해가 걱정이다. 피해자 신상, 문제의 영상물이 유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은 당국의 책임이지만 ‘너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의 추가폭행을 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