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참여재판(이하 참여재판)이 본격 시행되면서, 지방법원별로 참여재판이 속속 선을 보이고 있다. 참여재판은 대체로 미국식 배심제를 등뼈로 삼는다. 우리 재판제도가 향후 독일식 참심제로 갈지 미국식 배심제가 좋을지 검토하는 차원에서 시행되는 제도다. 아직은 여러 모로 낯설지만, 모의로 치러진 참여재판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은 데다가, 아무래도 법관만에 의한 재판보다 일반인들의 상식 잣대도 더한 재판을 기대하는 피고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순조롭게 돛을 올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걸음마 단계에서 불미스런 사안이 화제로 떠올랐다. 피고인은 참여재판에 의해 재판을 받겠다고 신청했는데, 피해자가 극구 이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할 뻔한 경우로, 강간 시도 중에 부상까지 입은 케이스다.

해당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을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의 신청에 따라 참여재판으로 이를 진행하고자 했다. 마찰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참여재판으로 치러질 것을 통보받은 피해자가 증인 출석을 강하게 거부한 것이다. 검찰측 역시 참여재판으로 강행할 경우 공판준비기일에 가장 중요한 증인인 피해자의 출석이 어려워 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재판부는 이에 대해 독자적 판단으로 피고인의 신청권보다는 피해자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피고인의 신청권이 더 중요하다고 명시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신청을 거부해 버릴 방안도 마땅찮고, 그렇다고 강행하기도 난감한 상황에 끼여 있다가

간단히 말하면, 참여재판을 신청할 피고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이미 이 제도 도입 단계에서 기본을 잡고 시작했는데, 피해자(증인으로 나올 경우 문제가 된다고 볼 것인데)의 사정이나 의사의 반영 문제에 대해서는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법에 따라 재판과 결정을 해야 하는 법관들로서는 난감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중앙지법의 해당 재판부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법에 의해 일하는 법관으로서는, 이런 경우에 참으로 난감했을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진행을 할 수 밖에 없음도 짐작한다. 또 그런 진행 과정 중에 겪었을 직업적 고뇌와 인간적 갈등에 이르면 차라리 고생했다는 위로라도 하고 싶다.문제는 앞으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같은 어정쩡한 진행과 옥식각신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드는 이 제도의 맹점에 있다.

그런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명시적으로 이러저러한 몇몇 사건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주장하는 참여재판을 받을 권리보다 남들 앞에 불려나와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피고인의 권리가 더 우선한다고 못박아 놓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세심한 배려 하나가 없는 상태로 출범한 참여재판의 일부 공백이 뜨악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검사 앞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이나 법원에 출석해 공판정에 서는 자체도 극히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다. 하물며 강간 등 성폭력 사건임에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성관련 범죄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는 경향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 왔지만, 아직은 강간 피해자 등이 경찰과 검찰, 법원 등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과정에 받아야 상처가 없지 않다.

이런 와중에 참여재판을 하겠다는 생각에 피해자를 다수의 일반국민(물론 배심원단이라고는 하나) 앞에 불러내 증언을 듣겠노라고 하면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 다음에, 직접 출석 없이 비디오 증언이나 차단막을 친 채 증언하는 방안도 있다고 대안을 제시해 봐야 설득력이 있겠는가? 피고인이 무죄 추정인 것은 맞다. 그를 함부로 죄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에게도 여러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범죄들도 아닌 성범죄 피해자를 '피고인이 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여러 시민

들이 배심원단으로 자리한 재판정에 불러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권리와 시스템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주었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증인을 강제로 불러낼 방법이 없고, 2차 피해도 염려된다는 피해자와 검찰측의 주장이 받아들여 일반재판으로 진행하기로 결론났기에 다행이지만,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대체 피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해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향후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피고인의 의중에 따라 '모든' 참여재판이 제동이 걸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참여재판의 형해화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성범죄 등 민감한 사안 몇 가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를 거쳐 (거의 대부분 증인으로 법정에 나서야 하는) 피해자가 참여재판을 거부할 권리가 피고인이 참여재판을 신청할 권리보다 당연히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해 둬야 할 것이다.

임혜현/투데이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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