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노승림 객원기자 = 고전음악을 작곡 당시의 편성과 악기로 재현하여 연주하는 것을 원전연주 혹은 정격연주라고 한다.
20세기 중반 일부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처음에는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부 원전 연주자들이 옛 악기를 재현해 실제 연주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1991년 모차르트 서거 250주년과 바흐 250주년이던 2000년 두 차례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무시할 수 없는 이론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악기의 구조와 형태가 현대악기와 크게 달랐던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 음악에 대해서는 현대악기 연주가들조차 원전연주의 해석과 주법을 차용하기에 이르렀다.
원전연주사에서 헤레베헤와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의 입지는 '한 차원 더 정제되고 세련된 원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최초의 선구자들의 연주는 악기만 원전악기를 사용했을 뿐 모던 악기의 주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레온스카야), 이후의 연주는 극단적인 원전의 편성 및 주법을 고집하거나(레온하르트/쿠이켄) 혹은 현대 해석과의 타협을 시도했다(아르농쿠르).
그 결과물들은 너무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여 영적인 측면을 상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주력에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
이런 사전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헤레베헤의 연주는 원전에 최대한 충실한 가운데에서도 작품이 가진 서정성과 영적인 성격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측면, 그리고 연 주력에 기복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애호가들 사이에서 찬사를 받아왔다.
11일과 12일 LG아트센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연주된 바흐 b단조 미사의 경우만 해도 그는 이 합창곡을 버진 베리타스와 아르모니아 문디 프랑스 양쪽 레이블을 통해 두 번 녹음했다.
양쪽 녹음이 완성되기까지 꽤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퀄리티와 해석상에 있어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은 이 지휘자와 악단이 가지고 있는 불변의 내구성을 확인시켜준다.
만약 이 두 가지 음반에 홀려 공연장을 찾아갔던 관객이 있다면, 그들은 음반 이상의 라이브의 감동을 한껏 만끽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프라노 요하네스 조머를 제외하고는 음반 녹음 때와 비교할 때 솔리스트 및 합창단원, 그리고 악단의 명단은 많은 부분 바뀌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헤레베헤의 사운드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악기의 유약함으로 인하여(원전악기의 거트현은 습기와 열에 특히 약하기 때문에 뜨거운 조명 아래 연주하는 현대 공연장의 조건은 대단히 열악한 편에 속한다) 명반을 남긴 원전연주 악단이라 할지라도 실연에서는 한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헤레베헤의 악단과 합창단의 연주력은 큰 편차가 없었다. 코드키가 없는 호른과 바순을 제외하고는 모든 악기들이 정확하고 고른 기량을 보여주었으며 합창단과 최고의 앙상블을 이루어 냈다.
다만 2부 후반부 상투스에 접어들면서 템포가 느려지는 경향을 보이긴 했지만 음악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요하네스 조머의 목소리는 음반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청아했다. 서정적이긴 했지만 감정의 기복이 넘치지 않아 화려하지 않은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 했다.
지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그녀의 이러한 목소리의 특성은 오랜 음악적 파트너였던 헤레베헤의 음악을 바라보는 견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 알토 대신 도입한 카운터테너의 음성(다미앙 귀용)은 미사곡에 중성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다만 정확하게 연주하기가 가장 난해한 악기로 소문난 호른과 바순 사이에서 ‘Quoniam tu solus Sanctus’를 노래한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의 독창은 음정상 약간 아슬아슬한 바가 없지 않았다.
수십명으로 이루어진 악단과 합창단이 이처럼 일관된 수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70년 창단 이후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긴 했지만 단원들 대부분이 젊은 멤버로 교체된 것을 감안할 때 그러한 일관성의 공로는 한 번 선택한 해석과 사운드, 그리고 연주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주장을 잃지 않는 '결벽주의 수장' 헤레베헤에게 돌려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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