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설집 '웨하스'로 돌아오다



- 하성란은 지난 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에 들어갔고,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문단의 화제가 됐다. 소설집으로는 신작 '웨하스'와 '루빈의 술잔(1997)''옆집여자(1999)''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2002)'가 있고, 장편으로는 '식사의 즐거움(1998)''삿뽀르여인숙(2000)'이 대표적이다. 그간 동인문학상(1999), 21세기문학상(2000), 한국일보문학상(2000) 등 문단의 유수문학상도 잇달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22일 오후 홍대 앞 음식점에서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이 발족됐다. 지난달 출간된 '작가들의 연애편지(생각의 나무)'에 연서를 실은 27명의 문인들이 출판기념회를 가진 것이다. 하성란(39) 소설가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편지도 서간체 문학의 형식이므로 기꺼이 참여하게 됐다고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온라인메일이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편지들을 대체한 이때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 연애편지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성란의 신작 소설집 '웨하스(문학동네)'도 이처럼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아날로그 감성을 내재하고 있다. '웨하스'는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각종 문예지에 발표했던 11편의 단편들을 함께 묶은 소설집이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짜낸 그녀의 촘촘하고 유려한 직조물은 “이제는 원하는 걸 쓸 수 있다”는 등단 10년차의 고백을 입증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상의 환부를 찬찬히 응시하는 그녀 특유의 '마이크로묘사'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주요무기로 쓰인다.


▲ 신작 '웨하스'는 수록된 단편 '웨하스로 만든 집'에서 따온 것 같다. '웨하스'를 표제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 '강의 백일몽'과 '웨하스로 만든 집'의 '백일몽'과 '웨하스'가 이번 소설집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겉으론 단단해 보이고 이상이 없으나 실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웨하스를 예로 들면, 과자 중에 드물게 두 겹으로 포장돼 있고 속포장지를 벗겼을 때도 네모반듯하게 잘 정렬돼 있다. 그러나 먹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먹는 내내 허술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11편의 단편을 묶어낸 이번 소설집이 어쩌면 또 하나의 '웨하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소설집이 다루고 있는 삶의 부조리함이나 인간관계 등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 이번 소설집의 단편들은 공통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미로처럼 긴밀히 얽혀 있는데 어느 순간 합일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를 환기시키는 시간에 대한 사유가 특히 돋보이는데 본인의 소설에서 '시간'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방향성에 대해 말한다면.
- '강의 백일몽'이 특히 그러하다. 한 소설 안에 시간 이동정보가 심하다. 소설 자체가 서사구조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주인공이 지난 과거와 지금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가. 어떻게 변하고 있나. 시간이 우리를 얼마나 풍화시키는가. 이런 시간의 변화를 축으로 한 시간의 아름다움과 기만성을 소설 속에 드러내고 싶었다.

▲ 소설집 '웨하스'에는 전작에 비해 유난히 여성 화자 주인공이 많다. 본인의 소설 속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 새 소설집을 준비한 4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여자로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여성화자 위주의 자기고백적인 글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에 어떤 차별을 두진 않았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꿔 읽어도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고정된 이미지의 성역할이 있다면 할머니와 어머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노동을 하는 반면 남성들은 대개 사라지거나 묻혀 진다. 자기 몸을 움직여야만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억척스러웠던 삶, 내 주변의 여성들이 늘 그랬다.

▲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L''H'와 같은 영어이니셜이나 '남자''여자'로 명명된다. 이름에서도 중의성을 부여할 수 있는데 굳이 이니셜 등을 쓴 이유는.
-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각됐거나 혹은 재생된 과정에서 모호해진 이름으로서의 의미다. 이것 역시 시간의 기만성을 드러낸다. 인물들에 대한 이름조차 가려지고 모호해져서 이니셜로 표현된 것이라 보면 된다.

▲ 각 단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찬찬히 읽힐 수밖에 없도록 세부묘사가 큰 맥을 이루고 있다. 김윤식 평론가도 일찍이 '마이크로묘사'로 일컬었으며 일부에서는 '영화적인 묘사'라고도 했다. 이런 문체를 이번 소설집에도 고집한 이유는.
- 이 문체를 통해 관찰자의 시점으로 대상을 쭉 따라가다 보니 시간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다. 마이크로이긴 하지만 현재진행형이 이미지와 서사를 단절시킨다, 카메라워킹처럼.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

▲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설을 쓰고 난 후의 애착감이란 없다. 소설 쓰기 자체가 즐겁다. 늘 '소설'이라는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있다. 아이를 업고 있는 동안에는 두 손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다. 놀러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늘 소설 쓸 생각을 한다. 다만, 쓸 때 많이 고심했던 단편은 '극지호텔'이고, 그 중에서도 재미있게 썼던 것은 '그것은 인생'이었다.

▲ 현재 집필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소설이 있다면.
- 상상력을 자극하고 독창적인 소재들로 써 보고 싶다. 미셸 우엘벡이 쓴 '소립자(열린책들)'처럼 신성한 상상력이 화두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두 개다. 하나는 예전에 중편으로 발표했던 '구미호' 이야기인데 구미호가 '귀신의 집'에서 구미호 역할을 하면서 지낸다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문화일보에 한 달 간 연재했었던 '주홍글씨'인데 '현대판 아마조네스'다. 아직도 존재하는 여성차별과 관련해 독특한 여성집단이 우리 속에 있다는 가정 아래 쓰고 있다. 10월말까지는 마무리 짓고 문예지 겨울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 요즘 사람들의 책 읽기에 대한 생각과 책 읽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면.
- 시절이 인물들을 만들어 내긴 하지만 대학생들이 예전의 고등학생 같다. 생각 없는 학생이 많다. 그건 독서를 하지 않아서다. 책 읽는 일은 쉽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책 읽는 즐거움은 그만큼 오래 남는다. 영상을 보는 일은 쉽지만 금방 잊는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엔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죽고 사는 문제는 철학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시기를 놓치다 보니 삶에 대한 태도도 진지하지 않다.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것만 쫓는 오늘의 여러 가지 증후군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성란의 신작 소설집 '웨하스'를 가만 읽다보면, 작가가 조명한 '웨하스'의 이중성이 겉보기엔 말짱하나 위태하기 그지없는 오늘날 우리의 또 다른 이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지털이라는 최첨단 외형으로 무장했지만, 실은 '웨하스'처럼 속이 허술한 시대를 사는 우리. 투박하고 느리지만 따뜻하고 촉촉한 아날로그의 감성이 그리운 시대다. 하성란의 '웨하스'를 읽고 과거의 내게 또박또박 펜으로 눌러 쓴 '편지' 한 통 보내도 좋을 가을이다.

채지혜 기자 cjh@today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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