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란

양란여사(洋蘭女史)

며칠 전 집에서 작은 모임을 가졌다.

오래동안 사귀어 온 친구들인데 무슨 경사나 핑게거리가 있으면 서로 초대해서 저녁 같이 먹고 세상 사는 이야기 하다가 헤어지는 친목 모임이다.

그 중에는 얼마 전에 유방암 수술을 한, 자태가 고운 C씨도 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분의 낙심하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완쾌됐다고 지난 달에 그 녀 집에 모여서 잔치를 했을 때는 모두들 축하한다는 덕담을 건넸다.

이 번에는 외손자의 돌이라고해서 우리가 불렀더니 대부분 아기 옷이나 장난감을 사왔는데 K씨는 양란 한 분을 선물로 가져왔다.

아마 집사람이 양란을 좋아하는 것을 눈여겨 봐 두었다가 사 온 모양이다.

집사람이나 나나 우리부부는 양란을 좋아한다. 우선 꽃이 좀 묘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간드러지게 예쁘다. 게다가 보통 꽃은 열흘 가기가 어렵다는데 이 놈은 습기와 볓만 잘 조절해주면 한 두달은 보통이고 어떤 때는 한 석달도 그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폈던 꽃은 다음 필 때까지 보통 일년 정도 걸리는데 이 놈은 한 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꽃순을 내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보일듯 말듯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꽃순이 예뻐서 죽을 지경이다.

기다림이란 그렇게 사람을 설레게 하는가 보다. 우리는 그 놈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꽃몽오리를 맺고 또 며칠 그렇게 애를 태우다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리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른다.

여보, 얘가 폈어!

K씨가 사온 양란 줄기는 패션 모델처럼 쭉- 뻗어 올라갔는데 하얀 꽃송이들은 매리 포핀스에 나오는 주인공이 썼던 모자처럼 바깥 쪽은 하얗고 암술방 쪽으로 가면서 분홍색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홀쭉한 몸체에 매달려 있는 꽃송이들은 아직 피지 않은 몽오리까지 하면 꽤 많은 숫자가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힐끗 보니까 오히려 양란이 부끄럽다는듯이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있다.

손님들이 떠나간 뒤에 헝클어진 응접실을 대충 치우고 나서 집사람과 나는 그 꽃을 어디다 놔두는 것이 좋을가 잠시 궁리를 했다.

여기 저기 들고 다니면서 놔 보기도 하고 옮기기도 하다가 결국은 식탁 모서리로 결정했다.

그 녀는 우리와 식사때 마다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어제 아침이었다. 옴마, 옴마, 이 걸 어째! 집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야단이다. 꽃송이 중의 한 놈이 시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럴리가 없는데-- -

자세히 들여다 보니 과연 제일 뒷켠 쪽에 있던 중간 크기의 꽇송이 하나가 시들시들해 가고 있었다.

저런! 왜 그렇지? 이제 끝물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뭔가가 잘못 됐을거야. 우리는 시들어가는 놈을 어루 만지며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지만 꽃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로와 갈증으로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그 옆에 있는 놈도 아직은 상태가 그 것 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마 물을 너무 많이 주었거나 화분 밑이 막혀있기 때문일거야.

집사람은 용의자를 체포한 수사관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보니 그 날 저녁 손님 중에 화초 전문가 한 분이 한 얘기가 생각났다.

많은 사람들이 양란을 기르기 어렵다고 하면서 죽이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양란을 비롯한 대부분의 화초들은 물을 안 줘서 죽이기 보다는 너무 많이 줘서 뿌리가 상해 죽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것도 그럴지도 모른다.

사 올 때 꽃집에서 싸 준 화분 포장을 풀지 않은 것이 탈이었다.

집사람은 즉시 식탁위에다가 신문지를 넓게 펴고는 화분을 거꾸로 들어 쏟았다. 그 모습은 마치 신생아를 받아낸 의사가 아이를 거꾸로 들고 볼기를 찰싹 때리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동작과 아주 흡사했다.

아이는 볼기를 한 방 되게 맞은 다음 우렁찬 울음을 울며 비로서 이 세상에 새생명으로 온 것을 알리는 것이다.

화분을 벗겨내니까 탯줄같은 뿌리가 밀폐된 공간에 얼크러져 있다가 막 숨통이 터진 신생아처럼 대기를 향해 기지개를 펴는 것이었다.

에- 내가 다 시원하네. 나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집사람은 후두둑 후두둑 흙을 털어내면서 뿌리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보, 이 것 봐요. 썩었잖아. 그러면서 옆에 있는 요리용 가위를 들어 석둑석둑 물크러진 부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갔다.

나는 너무 많이 잘라내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보 그 놈도 뿌리가 있어야 살텐데 너무 많이 치는 것 아뉴?

나이를 먹어가면서 쓸데 없이 늘어나는 것이 잔소리다.

두고 봐요. 내 살려내고 말테니. 집사람은 마치 어려운 수술을 하는 의사처럼 신중했다. 일말의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식탁과 부억 바닥을 어지르며 한참 동안 화초를 어루 만지더니 드디어 일을 끝냈다. 화분도 좀 더 큰 것으로 바꿨고 화초용 흙과 비료를 적당히 버무린 다음 우리는 그 놈을 다시 바로 세워 심었다. 물론 화분 밑의 배수구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흙 밑에 숨어있던 환부를 제거한 것을 시원해 하고 있었다.

한 이틀 지난 후 우리는 꽃잎들이 생기를 되 찾아 살아나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집사람은 마치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전사처럼 어깨를 펴고 말했다. 거 봐요 내가 그랬잖아 살릴 수 있다고 - - - - -

화초는 가끔 분갈이도 해 줘야 하지만 썩은 뿌리는 과감하게 잘라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왜그런지 싱싱하게 살아나는 꽃잎 위에 C씨의 고운 자태가 어려 보였다.

우리는 앞으로 그 녀를 양란여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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