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주인으로 여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든 정책이든 국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정권 획득은 물론 정권 유지와 재창출을 위해서도 여론에 순응하는 것은 리더의 필수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론 순응' 에는 복병(伏兵)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대중영합주의'로 불리는 '포퓰리즘'이란 비판이다. 포퓰리즘은 정치나 정책이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을 겨냥할 할 때 나오는 비아냥이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정권 때문인데, 이 정권은 대중을 위한 선심정책으로 국가경제를 파탄시킨 전형적인 실패한 정부로 꼽힌다.

지난 7일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즉각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한 후 최근에는 차기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를 백악관에서 만나는 등 '이라크 전쟁' 민심을 반영한 선거 결과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 백악관에서 강경 매파인 체니 부통령이 '여론'을 거부하고 있어 미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선거 패배이후 입을 굳게 다물어 온 체니 부통령은 17일 보수변호사 단체인 연방주의자 협회 워싱턴 모임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 철군은 미 동맹국들을 실망시킬뿐”이라며 의회를 점령한 민주당의 이라크 철군 논의에 쐐기를 박아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 냈다.

특히 법무부 차관을 역임한 마이클 위긴스는 “체니는 위대하다”며 “그 이유는 정치적 인기 여부와 상관없이 옳은 일을 하려는 용기 때문”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중간선거 결과에 담겨있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민심'을 거부하는 체니 발언을 포퓰리즘을 거부하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부시와 체니가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역할분담을 하고 있는 점을 한 수 접어둘 때 그렇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대북 및 정계개편 문제, 부동산 정책, 헌법재판소장 임명 등 각종 현안을 놓고 자중지란에 빠져있다.

청와대는 대세를 이루는 국민의 비판적 여론을 마치 일부 보수언론의 농간때문이라는 견해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듯 하다. 부동산 정책실패를 언론 탓으로 돌린 태도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보수언론의 계산되고 의도된 비판도 여론 형성에 한 몫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는 민의에 순응하는 분별력과 순발력을 갖지 못한 옹고집 탓, 늦장 대응 탓이 더 크다고 여겨진다.

노 대통령은 '여론 불응'이란 점에서 미 체니 부통령과 거의 닮은 꼴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체니 부통령은 보수 지지 계층으로부터 인기영합을 거부하는 용기있는 자라는 찬사라도 받는데 비해 노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참여정부가 겨냥한 중산·저소득 계층들이 등을 돌려 지지율이 10%대로 밀렸다. 정권 덕을 보고 있는 일부 지역, 일부 인사들만이 그의 지지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실 여론 순응과 포퓰리즘은 그 구분이 모호한 사후적 평가의 문제일 수 있다.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피하기 위해 여론 순응을 거부했다면 어불성설일 뿐이다. 노 대통령이 여론에 귀를 열어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았다면 그의 지지율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아시아청년포럼에서 “실패한 왕은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역성혁명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 진다. 물론 현 정국을 직설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닐 지라도 노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서 전임 대통령이 그런 말을 강조했는지를 곱씹어 봐야 할 것 같다.

코드 인사를 비롯한 노 대통령의 부적절한 정치적 판단과 처신은 여론존중도 포퓰리즘도 아닌 단순한 '옹고집'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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