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저자 인터뷰

바이크를 타고 나타난 김경주 시인이 발길을 머문 곳은 그의 아지트 '그늘' 카페

지난 15일 홍대 산울림 극장 앞에서 만난 김경주(30) 시인은 자기와 꼭 닮은 선 고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시인과 오토바이라니, 시인은 정적이라는 편견이 그를 선뜻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토바이에 탄 그를 뒤따라 상상만 했던 그의 뒷모습을 즐기며 '그늘'이라는 빈티지 스타일의 소박한 찻집에 들어섰다. 그곳 자그마한 창가가 김 시인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그의 공식적 아지트.

사실 이 촉망받는 젊은 시인에게 이만한 아지트 하나 쯤은 응당 필요해 보였다. 전라도 여수 출신인 그는 신춘문예(2003년)로 등단 후 서울 상경에 나섰고, 실제 일년 남짓 실어증을 앓았을 만큼 낯선 타향살이를 버거워 했다. 그러나 이날 시인의 아지트에서 마주한 그는 도저히 노트북 타이핑으로는 따라 칠 수 없을 만큼 밀도 높은 달변가로 변모해 있었다. 시간의 힘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엔 서울에 '작가로 살아 남고자' 노력한 그의 숨은 인내가 대단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눈들은 다행히 그의 첫 발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표사로 눈길을 끈 권혁웅씨의 문구는 더할 나위 없는 찬사였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권씨가 문단 내 지닌 지위와 신뢰도를 가늠해 볼 때, 그가 여지껏 쌓아 온 명성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용감한 축사'였던 것. 아울러 출판시장에서 신예시인의 첫 시집이 2쇄째 찍힌 다는 건 소위 하늘의 별을 딴 것이나 마찬가지.

그만큼 김 시인의 시집은 소위 '신춘고아'나 다름없던 그의 이름 석자를 문단 내에 단단히 각인시킬 수 있는 내공 깊은 시들로 묶여 있다.



다음은 김경주 시인과의 일문일답.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선보인 감회는 어떤가.
▲ 후련하면서도 두려웠다. 남자지만 시집간 느낌이랄까. 젊은 시인이 등단하고 4년만에 첫 시집을 냈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힘든 구조다. 출판사들의 경우 시집이 돈 안되는 거 알면서 누가 내 주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첫 시집이 나왔다는 것은 이 시집이 얼마나 소화력을 갖고 생산성을 지니느냐를 떠나서 일단 기념비적인 것이다.

-첫 시집인데 등단작이 빠졌다. 시들 선별은 어떻게 했나.
▲ 보통 첫 시집을 낼 때 등단작을 빼는 건 핵폭탄을 안고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를 감수한 건 신춘이란 제도 자체를 비웃고 싶었다. 신춘이란 등단 과정이 굉장히 포맷화 돼 있어 어느 정도 스킬만 갖추면 예심 이상권으로 들어갈 수 있다. 스물다섯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이년 바짝 공부해서 부끄럽지만 나도 그렇게 등단했다. 이같은 포맷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와 함께 현재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위주로 묶고 싶었다. 표현의 문제를 떠나서 식은 것들은 설렘을 주지 못했다. 지금은 이게 불편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시절에 내가 이걸 고민하고 있었지라고 스스로에게 좀 더 당당하고 싶었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을 단어로 뽑아낸다면.
▲ 경계와 기형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시집 제목이 표현하는 것도 경계이야기였고. 너무나 많은 경계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여기서 자유롭고 싶었다. 특히 자궁 자체가 가장 원초적인 하나의 경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자궁으로부터 나왔고 자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자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식은 이를 부자연스럽게 한다. 결국 자궁 자체로부터의 경계를 깨버리는 것. 데카르트가 철학적 방법의 태도를 건축술에 비유해 가장 밑에 있는 토대를 깨버리면 위에 쌓아놓은 게 다 허물어지는 합리론을 취했듯. 그래서 원초적인 것을 자궁 이후가 아니라 자궁 이전으로 보자 생각했다. 시 '외계' 경우에도 팔이 잘린 화가가 우린 팔 없이 태어났다 이야기하지만 실은 자기가 팔을 두고 올 수도 있는 거다. 이게 이번 시집의 핵심이었다. 이와 함께 경계가 많기 때문에 다 기형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서문에도 “이건 기형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밝혔다.

사진=이상운 기자 photo98@todaykorea.co.kr
-경계허물기가 주요한 작업이어서인지 형식적 파괴가 돋보인다. 특히 희곡의 형식을 빈 시가 많은데.
▲ 룸메이트가 영화 피디인데, 그 친구와 오래전부터 단편영화 작업을 해 왔다. 작가로서 가장 치중하고 있는 분야는 시와 희곡이다. 사실 희곡을 먼저 쓰다 우연히 시를 쓴 것이다. 희곡의 형식을 빌은 소재주의 전략이라기 보다는 직접 내가 쓴 희곡에서 끌어온 것이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는 시를 내년에 연극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연작시들이 눈에 띈다. 어떤 사유에서 시작됐나.
▲ 서울에 올라 온지 4년 반 됐다. 서울은 굉장히 낯선 외국이었다. 사투리가 심해 학부 철학토론회에서도 나의 진중함이 내 말투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등단 이후 '신춘고아'로 '유령작가'로 맴돌았다. 방한칸 없이 쫓겨났던 어느날 밤 남산에 올랐는데 십자가도 많고 불빛도 많더라. 저 불빛들이 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기어들어가는 하나의 구멍인데 나는 그것 하나 갖고 있지 않구나 싶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결의해서 교회 옥상에 텐트를 치고 살다가 반지하방에서 살게 됐다. 낮밤 할 것 없이 빛이 없는 방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시를 쓰면서, 건물 지하방들이 쏙 빠져나와 본능적으로 태양 가까이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상상에 이르게 됐다. 시 '우주로 날아가는 방 1'은 그렇게 절절히 탄생한 것이다. 오는 27일 홍대 SH클럽에서 열리는 '문학콘서트'에 참석할 양예정인데, 이 시를 메타 장르로 표현할 계획이다.

-'비정성시'는 시집의 22쪽 분량을 차지한다.
▲ 이 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다. 처음 썼을 때 A4 40장으로 중편소설 분량이었으나 여기엔 줄여서 실은 것이다. 소설보다 더 긴 시를 쓸 수도 있는 거다. 시는 20줄 안에 할 말을 끝내야 하는 것으로 관습화 돼 있다. 20줄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시적인 것으로 싸우면 형식에 대해서도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시인들이 시적인 걸 자꾸 찾아서 새로운 형식으로 다가가면 독자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폭이 한결 넓어지지 않을까. 젊은 시인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사진=이상운 기자 photo98@todaykorea.co.kr
-어머니 이야기가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시인에게 가족은 어떤 대상인가.

▲ 어머니라는 대상 자체를 모티브로 삼은 적은 없다. 내 시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연민이다. 연민은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동정과는 달리, 너와 내가 같을 수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시 안에서도 다수 표현했지만, 사람은 살아온 만큼 사라져 간다. 그 사라져 가는 것들에 진동을 느낄 때 연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병든 부모는 더 심하다. 피와 뼈와 살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는 것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겐 연민을 빼놓고 시 아닌 어떤 장르도 시도할 수 없다.

-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믿는가.
▲왕가위 감독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주로 쓰는 게 엇갈림의 미학이다. 너와 내가 만났던 혹은 스쳤던 그 사이, 그 엇갈림에 대해 미묘한 떨림을 느낄 수 있는 진동기를 댈 수 있는 게 시의 힘이 아닐까. 가장 미묘한 떨림까지 갖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시의 힘일 것이다.

-최근 시의 평가절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박산 소설가가 '시인공화국'이라는 소설 발표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강도가 칼을 들고 시 내놔라, 로또 복권에 기형도 시인이 맞춰지면 당첨이 되는 등 이 역시 평가절하된 시에 대한 이야기 구조를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다. 소설이 시에 대해 소설을 쓸만큼 시가 코너로 몰리고 있다. 박노해 시인 등이 활동할 때는 시인의 목소리와 육성이 절규에 가깝고 선동이었지만, 요즘 시인의 목소리는 비명이다. 누군가 선동적인 걸 발표하면 따라가진 않아도 창문은 열어본다. 그때는 누구나 눈에 보이는 적과 싸웠지만 지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다. 선배 세대들은 너희가 정말 불쌍하다고까지 이야기 한다.

-영향받은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 나는 고전 매니아다. 보들레르도 좋아하지만 랭보를 더 좋아한다. 시에 대한 설레임이 사라진 상황에서 과감히 시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갔다. 랭보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물론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놓지 않으려는 자세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시가 불꽃이라 할 때, 다 식은 것을 들고 후후 불면서 다니는 건 이상적인 게 아니다.

-문단 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은 젊은 소설가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젊은 시인들 간의 소통은 이뤄지고 있는가.
▲ 시동인 '불편'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근, 김민정, 이영주, 하재연, 장이지, 김경일, 안현미 그리고 나를 포함해 8명이다. '21세기'와 '시힘'이 한국 시단의 동인 양대 산맥으로 있지만, '불편'을 비롯해 최근 '천몽''인스턴트''얼음사다리' 등의 동인들도 움직이고 있다. 양적으론 '천몽'이 가장 많다. '천몽'에는 황병승 이후 소위 모던파들이 모였지만 과거와 다르게 노출해 활동하진 않는다. 동인 '불편'은 조만간 '천몽'과 더불어 출판사를 통해 동인지도 만들 계획이다.

-2시집은 언제쯤 계획하고 있으며 이외 출간 계획이 있는가.
▲ 2시집은 아직 틀에 잡힌 게 없다. 조만간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 한달여 몽골의 고비사막을 다녀온 여행에세이가 될 것이다. 겨울에 작업을 마무리 해서 내년에 나올 예정이다.

폭설, 민박, 편지 1
-'죽음의 섬(die toteninsel)', ahrvksdp dbco, 80x150cm, 1886

주전자 속엔 파도 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를 만지고 있었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 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편지(片紙)의 잠을 깨워나가기 시작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이 되었다
쓰다 만 편지들이 불행해져갔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작하고
방 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핏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몸속에 떠 있는 눈들이
꿈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건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안보인다는 혹성 곁에
아무도 모르는 무한(無限)을 그어주곤 하였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중

시인 김경주는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2005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카피라이터와 희곡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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