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 가 보세요

서울 이야기(2) 창덕궁에 가 보세요

서울에서 머무르던 3일 동안 나는 리움과 창덕궁을 보았다.
확연히 다른 모습의 두 건축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것은 불쾌함이 아니라 각기 다른 두 정점(頂點)을 본, 감동이 버무려진 즐거움이었다.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느낌, 그 것은 몇마디로 표현 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었다.
리움과는 대조적인 건물이었지만 역시 건물의 구성 요소는 직선과 곡선이었다.
세상에 직선과 곡선이 아닌게 뭐가 있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왜 그런지 그 게 그렇게 눈에 띄였다. 리움의 선이 곡선과 직선이 따로 존재하면서 조화를 이룬 구조물이었다면 창덕궁의 그 것은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교묘한 조합이었다.
기와지붕의 처마와 날개를 보자. 그 걸 직선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곡선인가. 나는 모르겠다.
당시의 목수들은 고등수학으로도 계산할 수 없을 것 같은 저 선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 봐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지붕의 선은 한자락 춤사위 같기도 하고 새의 날개짓 같기도하다. 출렁 움직일 것 같은 지붕 곡선이 파도라면 가지런한 서까래는 포말일 것이다.
나는 오랫 만에 보는 것이기 때문에 감상적인 분위기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되도록이면 냉정하게 보려고 애썼다.
한국 고건축의 중심은 벽인가 기둥인가 아니면 지붕인가.
서구의 건축이 벽과 기둥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면 우리 건축은 아마도 지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 나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우산이 귀하던 시절의 옹색한 예찬이라고 폄훼하지 말라. 신식 빌딩들의 견고한 벽과 화강암 기둥은 반짝이고 있었지만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그 어느 구석에도 작은 내 몸을 가려주는 처마는 없었다. 지붕은 품어주는 여유였고 가려주는 보호막이었다.
약간 무거워 보이는듯한 지붕을 이고 있는 돈화문을 지나서 들어서니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곳이 금천교다.
미술사가들이 아름답다고 떠들썩하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경우는 어쩔 수가 없다. 다리 아래로는 물이 흘렀을 것이 아닌가. 굳이 말하자면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정겨움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가끔 우리 궁궐의 규모를 중국의 자금성과 비교해서 너무 초라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건축물을 평하는데 어찌 그 크기만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자료에 의하면 창덕궁 건축이 시작된 때는 600년 전쯤 된다. 그 때 한성부의 인구가 10만 정도였다.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한인 인구가 15만쯤 된다고 한다. 수도 인구 10만에 저 정도 규모의 왕궁을 지었다면 그 당시 경제규모로서는 요즈음 누군가가 계획하고 있는 경부운하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다.
크기만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창덕궁이라면 단연 아름다움을 가지고 으뜸을 다퉈야한다.

임금의 집무실이었다는 선정전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섰다. 소음과 매연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숲이다. 누가 여기를 궁궐터로 정했을까. 나는 문득 우거진 나무들로 태양열을 차단한 숲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아담한 정자들을 세운 사람들의 성품이 궁금해 졌다.
그는 거친 손마디에 허름한 옷을 걸친 평범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뜻한 눈길과 여린 감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저런 정원은 만들 수 없다.
개개인의 성품이 얼굴에 나타난다면 아마 우리 민족의 품성은 건물에 나타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몇 발작을 옮기니 부용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부용정이다. 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자태가 한 송이 꽃이나 다름 없다. 사진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리 저리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는 차마 그 교태를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못은 정방형으로 땅을 상징하고 가운데 떠 있는 섬은 원형으로 하늘을 말한다고 했다.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킨다'는 뜻의 돈화문을 들어선 왕들은 저 후원을 거닐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정치를 베풀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옥류천 앞에 논을 만들어 놓고 왕이 손수 모내기를 한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날 서울 사람들은 어떤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창덕궁을 만든 사람들의 후예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백성의 고충을 알기 위해서 청와대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격렬한 목소리와 절제되지 않은 논리는 오랫 만에 고국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다.
미국에 돌아와서 나는 줄곧 창덕궁에 대해서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을 써야할지 내 머리속은 정리가 되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고건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왜 그런지 글 발은 풀리지 않고 공허한 이야기만 늘어놓고는 끝을 맺지 못했다.
뭔가를 썼다면 그 것은 창덕궁의 얼굴에 재를 뿌리는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결국 써보려던 욕심을 버렸다.

물론 역사를 내려오면서 재건되고 중건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저 창덕궁의 위치를 선정하고 건물을 배치하고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군데 군데 정자를 세우고 가꿔온 디자이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로 창덕궁의 얘기를 맺으려한다. '창덕궁에 한 번 가 보세요.'

* 창덕궁의 창건 혹은 중건 공사에 동원됐던 수 많은 이름 없는 대목과 석수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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