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설집 '참말로 좋은 날'로 돌아온 소설가

신작소설집 '참말로 좋은 날'로 독자들을 찾아 온 우리 문단의 소문난 이야기꾼 성석제 소설가

우리 문단에서도 손꼽는 '이야기꾼' 성석제(47) 소설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한층 설레고 즐겁다.

그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일상 언어들도 셀 수 없는 그의 수상 이력들처럼 화려한 것일까. 그는 십년여 남짓한 소설가로서의 전적에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숱한 칭찬과 격려를 아로새겼다. 그만큼 부지런히 써 왔다는 이야기도 된다.

지난 26일 소설가 성석제의 거주 지역인 경기도 군포 시내에서 저만치 성큼 걸어오는 그를 단박에 알아챈 건 순전히 사진에서 접했던 사람 좋은 인상 때문이다. 그 손에는 자연스레 펜 하나가 쥐여 있었고, 그는 '없으면 불안한 것'으로 이미 그 펜과 서로 뗄 수 없을 만치 길들여진 사이임을 고백했다.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가 나왔다는 그와 함께 들어선 차분한 찻집에서 두 글쟁이는 원두커피를 나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짙고 깊은 맛의 신작 '참말로 좋은 날'(문학동네)의 문구들을 주고받았다. 이날 나눴던 이야기의 한 자락을 여기에 내려놓는다.

다음은 소설가 성석제와의 일문일답.

-표제를 '참말로 좋은 날'로 정한 사유는. 이번 소설집은 '참말로 어두운 날'로 일컬어도 될 만큼 도시세대의 환부를 신랄하게 짚고 있다.

▲글을 쓸 때 울림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이번 표제는 다의적이다. '날'일 수도 있고 '날씨'일 수도 있다. 반어적으로 내면 풍경이 어두운 날에도 날씨는 좋을 수 있다. 단편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에 나오는 할머니가 버스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지하다방 마담이 마당으로 올라오면서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7편의 소설이 한 권으로 묶였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뼈대가 있다면.

▲직설, 직면, 직격이랄까. 시대처럼 전문화됐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과거에는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를 뭉뚱그려 넣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사람의 생각이랄지 느낌이랄지 이런 것을 표현했다고 본다면, 이제는 어떤 사람의 비극적 정황이 있으면 한 사물 한 사상 하나의 소설로 일대일 대응 체제다. 울림이 줄어들고 그만큼 속도가 빨라진다.

-이전 소설들이 대개 농촌을 소재로 하거나 도시 근교 농촌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도시 현실 한복판으로 성큼 들어선 느낌이다. 어떤 전향점이 있었나.

▲고향이 경상도 북부였고 경기도 이천에 작업실이 있었고 도시에 계속 거주하진 않았다. 다만 이걸 쓰는 최근 도시 거주 기간이 좀 늘었다. 높은 인구 밀도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자연 가까이 농촌공동체 생활은 자연스럽게 음율을 만들어 낸다. 소설거리를 직접 칠판에다 그대로 옮겨 쓰듯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삭이고 생각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표현을 하게 돼 있는데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현실이 내가 쓰는 소설과 은유 없이 직결된다. 또 그런 정황이 소설로 드러나야 한다.

-이같은 일련의 변화를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내가 내 소설에서 갖고 가는 건 반성이다. 해당 에너지가 충분히 반영되었는가. 살아있나 혹은 죽어있나. 이 책의 스타일 변화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작가에게 제일 무서운 것이 첫째는 답습이다. 자기도 모르게 되풀이 하고 있는 것. 그러면 숟가락을 놔야 된다. 또 하나는 공장에서 찍듯 비슷한 것을 피해야 한다.

-'고귀한 신세'는 반전의 묘미가 생생한 전형적인 단편 교과서라 할만하다. 그런데 주인공 박희제는 딱히 위선적인 인물도 아니고 나름의 자기 철학에 충실하고 부지런했던 사람이다. 그의 뜻밖의 부조리한 죽음이 지니는 의미는 뭘까.

▲소설 전에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십년여 전 스포츠 신문의 단신 사고사면이었다. 한 유명 건강전도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시를 쓸 때라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아 기억을 해 뒀었다. 그러다 재작년에 짧은 소설을 급히 쓰게 되면서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일차적으로 아이러니 자체를 말하고 있다.

소설가 성석제의 신작소설집 '참말로 좋은 날'(문학동네)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미학 그 자체로 충분하다 보는가. 아니면 어떤 의미 있는 깨달음이나 혹은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어 내거나 계도하는데 일정 몫을 해야 된다고 보는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소설을 쓰든 간에 소설이나 소설 읽는 사람에게나 우연한 결과물일 수 있다.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쓴 어떤 소설 때문에 노예가 해방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의도했지만 뜻대로 안될 수도 있다. 사실 소설의 유용성이나 계몽성을 강력히 부정해 왔었는데, 그건 소설의 운명 아닌가.

-우리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애명답게 어떤 소재 하나를 가져 와도 참 세밀히 시시콜콜 잘 안다 싶었다. '고귀한 신세'에 나오는 소위 웰빙 추세 부합 내용은 혹 정말 선생님이 웰빙의 한 가운데 놓이신 분이 아니실까 생각될 정도.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경험치가 있다. 웰빙은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주의다. 이기주의적 개인주의가 웰빙이다. 무조건 박애주의자가 되라거나 크리스마스 씰을 사랄 순 없지만, 성인 남녀가 여유 있으면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에게 한 달에 천원이라도 더 도울 줄 알았다. 근데 웰빙에 올인하니 재미있다.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는 인빈간다리, 사지땅, 넙춘이, 심청전 등 4가지 에프소드가 '영빈관다리 남쪽 낡은 삼층 건물의 영빈다방'으로 묶여 있다. 이 단편으로 말하고 싶었던 바는.

▲지명에 관심이 많았다. 지명은 인문주의의 집합소다. 사람들의 합의, 오해, 오독을 거친다. 여기엔 경상도 북부 사투리 특징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와 집단 기억이 사진처럼 멈춰 있다. 사람의 한 시절 한 인생이 하나의 사진으로 담겨서 저장되듯이 그런 지명이나 인명에 한 사람의 인생이 저장돼서 고정되는 것. 그것과 대응하는 현재의 개인들. 사물의 명칭과 어떻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가에 따른 관심이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액자형식소설이다. 그런데 액자 안팎의 이야기를 비춰 볼 때 굳이 이런 액자가 필요했나 싶기도 하다. 역사극으로 단도직입하지 않고 액자를 취한 까닭은.

▲주인공이 누군데 저렇게 했다더라 이야기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 텍스트를 소설로 가져 와야 겠다 결심하고 참고한 것만도 10종은 된다. 이 소설은 편집자가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전체 인생 해석이 달라진다. 장편을 쓸 때도 경험했는데 옛날 기록이라는 건 승정원일기, 개인문집, 소설 등 여러 기록 입장이 다 다르다. 한 겹을 덧씌워서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외삼촌과 외숙모의 대결을 보면 외삼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해 이야기하고, 외숙모는 어렸을 때부터 체득해 외우다시피 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박태보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외숙모다. 기록을 한 조카도 기록에 매달려 있는 측면이 있고. 그들의 취한 자세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이 책에서 제일 힘이 많이 들어간 작품일거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신뢰 없는 가족 구성원의 해체가 여실하다. 이들 형제 사이 혹은 부부와 자식 사이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다. 이 해체는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이라 보나.

▲해체의 신이 있어서가 아닐까(웃음). 장자에 보면 포정이라는 백정이 있는데 소를 잡을 때 뼈와 살을 잘 갈라 놓았다는데, 해체의 전문가가 임재하는 시대인 거 같다. 곳곳에서 해체가 벌어지고 있고 세대간 지역간 해체에 이어 가족까지 끝임 없이. 그 원인이 뭔지 너무 많아서 개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문제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냈고 세대적으로 봐도 콩나물 교실에서 지냈다. 나의 경우 동창, 동향, 공동체 단위 관념이 익숙해서 민감하게 비극성을 느끼는지 모른다. 출발점이 단체였기 때문에 해체가 불안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처음부터 개인으로 자라고 소속감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외에 해체될 게 없다. 나보다 앞선 세대들은 해체를 막연하게 생각했을 거고 민족의 분단 지역주의 거대 담론을 다뤘다면, 나보다 아랫세대들은 해체를 심각히 생각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었다'와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매우 유사한 가족 구성원을 지니고 있는데.

▲가장의 실직과 가장의 무능은 곧바로 집단 아사였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절대 굶어 죽진 않고 견뎌 낸다. 탄수화물 밖에 섭취 못해 빈곤층비만이 많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주 비참한 삶을 사는데 과거와는 다른 측면으로 사나마나한 삶을 살아간다. 굉장히 많을 거 같다.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소설가로서 이 정도는 기록해 둬야 하는 게 아닌가. 비슷한 소설을 두 편이나 만들게 된 것도 그 때문인 거 같다.

"소설의 신이 있다면 밥그릇 앞에서 그 은혜를 기리지 않을 수 없겠다"
-제목을 정할 때 중요시 여기는 작법이 있나.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를 포함해 제목들이 사유를 한 단계 더 거치게 만든다. 시의 은유를 즐기듯 그 작업이 즐거운데.

▲제목을 정하는 건 중요하고 힘들다. 제목을 미리 정하고 쓰는 경우도 꽤 있다.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도 그런 경우다. 김소월의 '산유화' 차용이다. 내용에도 시적인 느낌이나 리듬이 간섭을 해왔을 거고. 시라는 건 낭비가 없으니까.

-본인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인가.

▲소설은 창작자로 하여금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인류 최초의 예술 장르이다. 그런 장르에 종사하게 된 것이 행운이다. 소설의 신이 있다면 밥그릇 앞에서 그 은혜를 기리지 않을 수 없겠다. 술이라도 한잔 바쳐야 될 정도로 받은 게 많다.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도 읽었을 때 재미있다 공감해 주고, 마침 적당히 힘들 때마다 상을 받게 됐다. 지금껏 소설을 써 왔고 써 갈 것 같고 받은 게 많으니 갚아 나갈 거다.

-다음 작품은 언제쯤 만날 수 있나.

▲앞으로 낼 산문집이 이미 한 권 분량 정도 됐다. 산문집은 1년 뒤쯤 낼 생각이다. 장편이 문제다. 자꾸 생각이 분산된다. 써야겠다는 생각은 강해지고 빨리 체력단력 해야겠다. (웃음)

성석제 소설가는 시를 쓰다가 지난 1995년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의 유수 문학상을 휩쓸었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재미나는 인생''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와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아름다운 날들''인간의 힘', 산문집 '즐겁게 춤을 추다가''소풍' 등으로 꾸준히 독자와 만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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