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 이종엽 기자
최근 들어 '동해'가 정치권에서 핵심 화두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민족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보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고 비공식 제안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여론은 거의 '분노의 바다'로 빠지면서 거센 비판이 가해졌다.

하지만 곧이어 '원포인트' 개헌이라는 소위 히든카드로 '동해'관련 논란은 잠잠해지고 연이은 개헌 관련 성명 발표를 통해 소폭 지지율 상승까지 이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이후 일본의 반응은 동해에 대한 유일한 명칭은 '일본해'임을 재차 천명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사건이 커지자 청와대는 이와 관련한 기사를 처음 보도한 한 언론사의 보도에 대해 "당시 대통령은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제안하지 않았다"며 "한·일관계 등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동해 명칭 문제를 하나의 사례로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들과 정치권의 비판의 칼날이 대통령을 향하자 오히려 청와대와 외교부가 정부내에서는 '평화의 바다' 제보자를 색출해 책임을 묻겠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역사를 전공한 기자로서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과연 '동해'에 대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봤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우리 역사에서 '동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始祖 東明王'편 기사로 고구려가 건국한 졸본지역에 북부여가 있었는데, 그곳은 장차 고구려가 건국할 곳이니 북부여가 동해변의 가섭원으로 옮기라는 기록 속에서 '東海'의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삼국사기 15번, 삼국유사 14번 '동해'의 명칭이 등장하는데 우리 고대 역사에서 동해는 '호국신앙'과 '제사'의 근원이 되는 곳으로 등장한다.

특히, 신라의 문무왕은 직접 동해 용왕이 돼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을 쉽게 연상시킬 수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동해'에 대한 인식은 변함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급성장에 따라 우리의 바다 '동해'는 '일본해'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대륙진출을 위해서 반드시 차지해야하는 전략적인 요충지가 돼 버렸다.

일본에서 동해가 차지하는 관념적인 부분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섬 나라'에서 바다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넘어야할 산이기도 하다.
최근 유력한 대선 주자인 고건 전 총리 진영에서 대선공약으로 '한일해저터널' 건설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몇해 전 기자가 참석한 바 있는 한 역사학세미나에서 한일해저터널과 관련된 주장을 들은 바 있다. 그때 역시 고 전 총리 진영에서 나온 이야기와 비슷한 경제 효과 부분을 상당히 강조했었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지 않은 것은 그날 참석한 모 교수의 발언때문이었다.

"일본의 역사적 과제인 대륙진출을 상징적인 부분이지만 우리 손으로 직접 돕자는 것인가", "일본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터널에서 오히려 물류의 부분은 일본에 종속 당할 우려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 아닌가할 수 있는가"

당시 많은 부분에서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우리는 '동해'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우리 영토의 오른쪽에 있는 바다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에서 항상 그 궤를 같이 했었던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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