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거목

<사진=국가기록원>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향년 8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뒤 치료를 받아왔으나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25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1950년 '목포일보'의 사장이 됐다. 63년 민주당 대변인 시절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7·8·13·14대 국희의원을 역임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패배하고 87년, 92년 대선에서도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76~78년에는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한 후 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지만 국제사회의 압력 등으로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역임하며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11월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김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했고 이듬해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95년에는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해 네 번째 대권도전에 나선다. 그는 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통일운동, 인권신장에 혼신의 힘을 다해 민주주의의 정착과 남북 평화조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됐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0년 6월 13~15일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 수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각종 친인척 비리와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투데이코리아 최미라 기자 mil0726@today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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