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심윤경, 인간 존재의 허와 실 짚는 ‘칼날’ 시선

여기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투시하는 눈이 있다.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소설가 심윤경(35)씨의 화두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진폭이 확대되고 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2002)에서부터 무명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달의 제단'(2004), 그리고 이번 '이현의 연애'(2006)까지 장편소설만 세 번째인 심씨는 '운 좋은 작가'임을 자처했다.

작품 편수에 비해 평단의 호평으로 문단 내 진입이 눈에 띄게 빨랐으며, 작품마다 변화를 갈망하는 작가적 시도도 거침없이 행했다. 그리고 '달의 제단'은 KBS TV문학관 드라마로도 각색되는 재미를 누렸다. 무엇보다 이 길지 않은 글쓰기에서 고정 독자들을 만나 외롭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이날 수수한 옷차림에 단발머리로 나타난 심씨는 동안일 뿐만 아니라 소녀 같은 수줍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지막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해내는 작가 특유의 전형에 이르면, “소설이 나를 용감케 했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녀는 소설의 특혜를 그런 방식으로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번 작품집 '이현의 연애'(문학동네)에서 꺼내 든 화두 역시 '용감하게도' 영혼이다.

이 시대에 영혼을 이야기 한다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엉뚱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씨는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을 통해 우리 존재의 결정적인 허와 실을 짚는다.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이진의 말은 우리 존재의 부조리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대과학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부정한 영혼보다 현실세계의 이 몸체가 실은 더 실체가 없는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이 훼손되자 숨지고 마는 이진과 기록을 위해 다시 태어나는 이진의 연결고리는 '기록의 신성'을 강조하는 '희생제의'에 다름 아니다. 이게 이 소설이 숨기고 있는 비수다. '작가' 심윤경 또한 이 비수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매한가지다. 여기엔 심씨의 소설론을 기록하는 장으로 마련했다.


[다음은 심윤경 소설가와의 일문일답]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것으로 안다. 문장보다는 숫자와 더 친하게 지내왔는데 어떻게 글을 쓰게 됐나.

▲나는 문학소녀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도둑질도 알아야 한다는데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글 쓰는 일과 관련된 출판사 등을 찾아 다녔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회사와 인터넷 뉴스 회사도 다녔다. 그러나 소설 자체에 대한 갈증으로 다 그만두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 그런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결국은 글을 쓴다. 작가라는 사람은 얼마나 준비를 했느냐 교육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쓰고 싶었느냐가 아닌가 싶다. 데뷔 과정이 운 좋았다. 개인적으로 하던 일 다 그만두고 결혼하고 애 낳고 책까지 함께 쓰느라 힘들었는데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다. 그 과정이 순탄치 못했으면 지금쯤 엉망이 되지 않았을까.

-전작 대비 '이현의 연애' 반응은 어떤가.

▲전작들은 독자들의 반응이 균일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따뜻하고 평범하다는 평. '달의 제단'은 도전정신 부분이나 열심히 취재한 것을 인정받았다. 이번 '이현의 연애'는 편차가 가장 크다. 제일 좋았다는 분에서부터 제일 아니었다는 평. 성별이나 연령 상관없이 개인마다 달라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달의 재단'은 지난 추석 때 TV문학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방영됐다. 어땠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집안 어른들도 마찬가지. 그때 좋았다 말씀해 주신 분들이 대부분 이번 작품의 분위기를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난 아직은 변화를 더 모색해 보고 싶다.

-표제를 '이현의 연애'로 정한 까닭은.

▲이진은 순수한 관념 속의 존재이지 사람의 개념이 아니다. 이현은 인간 전체를 의인화한 존재로서, 그 사람의 사랑 또한 알고 보면 한시적이다. 한때의 열병처럼 연애감정으로 끝나고 마는 인간의 한계성을 말한다.

-이진은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다. 작가가 정의하는 기록의 개념은.

▲이진의 해석을 두고 기록자 작가 자신이 아니냐 말하는데, 무의식의 구체화일 뿐이다. 사회적인 의미로는 사회정의나 진실을 의인화하고 싶었다. 무의식이나 사회적 진실은 실체가 없다. 개인의 해석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문자로 고착화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시작된 것이다. 사람의 무의식은 절대로 기억될 수 없는 프라이버시인데, 자신의 이면에 대한 기록을 마주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토토로의 집''라 캄파넬라''창세기''외알 안경을 낀 사나이' 총 4편의 독립 단편이 '이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이번 장편소설 속에 유기적으로 합류했다. 기존 발표작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구성을 취하고자 했나.

▲처음에는 단편들을 각기 썼다. 이진이라는 여인이 기록을 한다는 구상 아래. 그런데 쓰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이진의 기록이라는 전제에서 글을 쓰다 보니 거기에 자꾸 맞춰가게 되더라. 그러나 이진은 그렇게 맞춰가는 인물이 아닌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런 구성이다. 각 단편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민을 공유하고 있다. 그 일괄성에는 손상분이 없었다.

-기록이 손상으로 인한 이진의 죽음은 분명 뜻밖이다. 그것도 불임증인 이현과의 관계에서 임신중독증으로 죽었다. 이진 어머니의 전례가 떠오르면서 연결 지점에 놓이긴 하지만 자가생식이라는 건 생뚱맞다. 결국 기록의 중요성에 무게를 얹기 위해서였나.

▲이 소설은 사실주의를 많이 떠난 소설이다. 이진은 스스로 잉태하고 자기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존재다. 무의식이나 사회정의 혹은 진실 등 숨어 있던 것이 목격되면 그 계기를 통해 죽고 다시 태어나고 그러면서 새로워진다. 손상된 기록에 대한 희생제의로 봐도 무방하다.

-소설의 허구는 어디까지 가능하다 보는가.

▲소설은 허구를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장르이므로 무한대다. 소설 속에 허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다큐멘터리가 되는데 드라마틱해지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큐에서 한발 물러서야 되는 게 아닐까. 너무 격렬한 현실 앞에서는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는 소설도 우스워질 때가 있다.

-이현을 재경부 고위공무원으로 설정함으로써 이진과의 대비로 캐릭터가 한층 돋보였다.

▲정말로 이진과는 반대개념이다.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사업가라고 하면 너무 자유롭고,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조직을 대표하는 순응적인 인간으로서의 공무원을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재경부가 가지는 현실개념의 이미지를 부각했다.

-작가가 이현을 세 번이나 이혼시켰다. 굳이 무리수를 둬가며 세 번이나 이혼한 것으로 설정한 까닭은.

▲정계에 뛰어들 꿈까지 꾸는 인물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데, 사생활만큼은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자 하는 스타일로 세속적 욕망을 지닌 사람으로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이진에 대해서 아주 집착하지는 않는 스타일로 그리기 위해서다. 결혼에 대해 별다른 겁이 없어야 별난 여자와 결혼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듯싶어서다.

-극중 경제부총리는 동성애자로 드러난다. 그러나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영역으로만 그린다. 동성애 코드를 자제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보수적이다. 동성애란 굉장히 큰맘 먹고 저질러야 하는 이탈이다.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형편이다. 고대 혹은 전근대사회에서도 동성애자는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기 마음을 모른 채로 그런 걸 상상치도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 그런 전형으로서 부총리를 설정했다. 부총리의 모델은 토마스 만이었다. 그는 사후 20년 후에 내 일기장을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20년 후에 열어보니 자신이 꿈꿔왔던 동성애의 갈망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두고 죽었던 것이다. 토만스 만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쓰라리게 인식하고 예술가로서의 고백을 한 것이다.

-오늘날 영혼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매우 드문 행보다. 영혼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함의는.

▲시대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시도해 보고 싶었다. 영혼과 인간이 천연덕스럽게 공존하는 남미쪽 소설의 영향이 크다. 내 소설 속에서도 구현해 보고 싶었다.

-라틴아메리카 작가나 작품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칠레 작가 '바르가스 요사'와 '이사벨 아옌데'를 특히 좋아한다. 아옌데가 미친 영향이 크다. 그 에너지 넘치는 파워풀한 서술은 백미다. 소설 '영혼의 집'은 읽은 지 오래인데 지금도 흠뻑 빠져 있다. 허구를 더하기 어려울 만큼 격렬한 현실의 쿠데타 사건을 그렇게 우아하게 힘이 넘치는 소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참 경이로웠다. 이외 미국의 토니 모리슨 같은 작가도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묵어 다루기 어려운 성차별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다. 책임감이 있다면 사회현실을 외면하는 작가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포장해 현실을 왜곡치 않고 인간애를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뼈대를 한마디로 짚는다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이현의 연애'라는 제목이 직역하자면 인간의 한계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분투했음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 물론 자기연민이기도 하다.

-소설의 대중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문학시장이 이만큼 축소된 데에는 독자에게 친군하지 않은 소설을 쓴 탓도 크다. 막상 쓰다보면 소설 미학에 계속 욕심이 생기고. 언젠가는 이 둘이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이 오지 않겠나. 대중성이라는 건 딱 부러지는 전형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만 맞추려 하면 자기의 뼈대가 흔들릴 수 있는 부분이다.

-소설가 아내와 엄마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공부하던 거 다 그만 둔다 폭탄선언 했을 때 다들 말렸는데 지금의 남편만 너한테는 딱이다 말해줬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성원해 준다. 딸은 아직 일곱 살이어서 피상적으로만 안다. 한동안은 가정생활과 작업을 함께 하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평화롭게 융화된다.

-글은 주로 언제 쓰나.

▲아이가 어린이 집에 간 낮 시간에 주로 쓴다. 생활 리듬은 밤 쪽인데 다 나에게 맞출 수 없으니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도시건축가 김진애씨는 여자의 30대는 성취하는 시대가 아니라 버티는 시대라고 얘기했다. 잡고 있는 걸 놓치지만 말아라. 참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다.

-다음 작품은 언제 만날 수 있나.

▲올해 실천문학 문예지 봄호부터 연작으로 150매 분량 4~5회 준비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신라시대는 토착생활방식에 불교와 유교라는 거대 외래 종교가 만나는 지점이다. 굉장한 마찰과 갈등이 일어났을 것이다. 남은 사료가 자세하지 않아 역사의 공백이 워낙 많아 상상력 개입 여지도 많다.

-당신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인가.

▲나를 참 홀리게 하는 존재다. 나는 굉장히 소심한 안전제일주의자다. 과감한 행동보다는 한 발씩 조심스럽게. 그러나 소설과 함께 라면 굉장히 과감해 진다. 평소의 나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행동들을 하는 나를 보며 놀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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