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자 황춘자씨의 '꿈꾸는 노년'

[부산=박진영 수습기자]그의 인생에서 노년은 '절정의 계절', 그런 노년의 인생을 즐기는 비법은 무엇일까.

자원봉사자 황춘자(71)씨는 '봉사'라고 말한다. 부산 양정동에 위치한 부산시자원봉사센터서 13년 동안 '한글서당' 선생님으로 활동 중인 그는 "봉사를 하는데 나이가 많고 적은 게 무슨 상관이냐"며 "내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즐겁게 지내다 보니 아플 틈도 없다"고 말한다.

봉사를 하게 된 건 본인의 황당한 경험 때문이다. 92년 미국에 사는 딸을 만나러 갔을 때 얘기다.

"주차장에서 혼자 차에 앉아있는데 경찰이 오더니 화를 내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몰라 울면서 사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죠. 후에 그 일이 불법 주차로 100불짜리 교통 위반 딱지를 떼인 것이라고 들었어요. 정말 속상했죠."

한국에 돌아온 직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54살 전업주부의 영어 완전정복기가 시작된 것. 처음에는 모질게 공부했지만 점점 재미있었다.

"잠도 줄여가며 공부했어요. 부산역 열차 승강장에 종일 혼자 앉아있으면서 여행 중인 외국인들에게 무작정 말을 걸었죠. 말이 되든 안되든 계속 걸었어요. 내가 못해도 비웃는 외국인은 없었어요. 틀려봐야 실력이 늘어요."

이런 노력으로 미국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의사소통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이때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미국에 사는 동생이 미국에서는 노년층도 봉사에 적극적이라며 저에게 자원봉사를 권했죠. 이 나이에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에 마침 한글서당 자원봉사자 모집공고를 봤어요. 바로 찾아갔죠."

한글서당은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수업. 이곳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캐나다에서 온 대학교수 야닉(Yanick.33)씨의 개인 선생님이다. "수업은 일대일 방식으로 이뤄져요. 한국에서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들이 조금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한국말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야닉씨는 그를 "학생들을 자식같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자신의 '코리안맘'"이라고 말한다.

통번역 봉사도 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부산항만공사(BPA) 국제 여객터미널에서다. 바다처럼 고운 옥색의 봉사자 단체복을 입은 그.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친절하게 맞는다. "내가 외국인에게 베푼 한 번의 친절이 그 외국인에게는 한국에 대한 인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이곳의 영어 통번역 봉사자는 모두 10명. 평균연령 일흔이 넘는 '슈퍼어르신들'이다. 열심히 세력 확장 중인 신종플루의 기승은 고령의 봉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라고 왜 걱정이 없겠는가. 아직 자원봉사자에 대한 사회 배려가 부족하다고 한다. 봉사자들이 부산항만공사로부터 마스크 한 장 지급받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원봉사자에 대한 공공 기관의 무성의한 태도! 섭섭한 마음도 있었겠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기쁨, 섭섭함보다 그 기쁨이 훨씬 더 커요. 지난 2년 동안 이곳 여객터미널에서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온 다양한 여행객들을 도왔죠. 요즘 같은 글로벌시대에 한국을 알리는데 일조하면 스스로에게도 뿌듯한 일이지 않나요."

사람이 살면서 남을 돕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는 2150시간, 꼬박 90일을 남을 위해 살아왔다. 몇 년 전부터 부산자원봉사센터의 봉사마일리지 통장에 적립된 봉사시수. 남산정 복지관서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와 96년부터 몇 년 전까지의 기록되지 않은 봉사까지 더하면 그 이상이다.

"봉사마일리지 통장이 늘어날수록 행복해요. 부자가 뭐 별거 있나. 예금 통장 5개 이상 가진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봉사마일리지 통장을 5개 이상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걸요."

그는 걸음이 빠르다. 일주일 내내 촘촘하게 짜인 봉사 일정을 완수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는 봉사를 계속하고 싶다. 아직은 아니지만 제발 관절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말할까.

"봉사를 끝내고 집에 와서도 꾸준히 영어를 공부해요. 학생들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하루에 5시간 이상 못자요. 자리에 누워서도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요. 이제 바쁜 일정이 몸에 배서 그런지 힘들지도 않네요."

공자는 나이 일흔을 종심(從心)이라 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이다. 황춘자씨에게 나이 일흔은 종학(從學)이다. "1년을 공부해서 1년 반이라도 편하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종학(從學)은 간단하다. "아들이 공부했던 영어책을 봤는데 책만 봐선 영어박사도 했겠더라고요. 근데 외국사람 만나면 말을 못해요. 나이가 많다고 부끄러워 말고 부딪혀가며 배우는 거예요. 저도 부산역서 처음에는 외국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 '당신 나라의 날씨는 어떻느냐'부터 물어봤어요. 힘들어도 계속 하다 보니 영어로 말하기가 조금씩 쉬워졌죠."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정'."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엔 목표를 하나 더 정했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봉사.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니 돕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미국서 겪어봤잖아요. 저도 다문화가정 여성들로부터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도 배울 수 있고 일석이조인 셈이죠."

황춘자씨는 '절정의 계절'을 더욱 즐길 계획이다.

"인생에는 쇠퇴기가 없어요. 의욕만 있다면 나이가 들어도 뭐든 할 수 있어요. 전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싶었고 그 후로는 제가 얻은 능력으로 남을 돕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일 뿐이지요. 나이가 많다고 망설이지 말고 꿈이 있다면, 시작하세요. 머지않아 이루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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