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제비를 기르다' 낸 윤대녕 소설가

소설가 윤대녕(45)의 소설 속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사람이 흘러간다.

혹자는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아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뚜렷한 선악이 없어 흡입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특정 사건보다 선악의 대비구조보다 더 선명히 마음을 가로채는 뭔가가 분명 있다.

신경숙 소설가의 표사대로 “관계들이 이렇게 시시할 수가 있나 좌절감이 들 때, 일부러 그의 소설들을 찾아 읽을 때가 있다. 그는 사소한 개인을 신화적으로 이끌 줄 알아서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너도 사뭇 소중하고 장엄해지는 것이 은근히 살아갈 맛”이 생겨난다.

그게 우리가 '윤대녕식 소설'에서 쉽사리 맘을 떼지 못하는 '맛'이기도 하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신작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와 함께였다. 지난 2004년부터 주요 문예지 지면을 통해 발표했던 8편의 소설들이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였다.

여기엔 그가 지금껏 다뤄왔던 '관계'들이 한층 더 깊숙이 조명됐다. 그간 남성성에주로 맞춰져 있던 시야가 여성성으로 확장되는 시점이었다.

[다음은 윤대녕 소설가와의 일문일답]

-신작 '제비를 기르다' 반응은.

독자들 리플을 읽었는데 소설창작집 중 '제일 낫다'고 해서 사실 당황했다. 그 시기마다 주제가 있으니 연장선상에서 봐주면 좋은데, 작품집을 개별로 두고 단순선상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

-표제작을 '제비를 기르다'로 정한 까닭은.

▲출판사가 정했다. 그 작품이 중편으로 제일 길다. 지난 가을 작품으로 근래작이기도 하다. 문예지 발표 당시에도 '윤대녕스럽다' 호평 받은 작품이다. 책 낼 때 출판사에 많이 맡긴다. 창비(창작과비평사)에는 믿고 편하게 맡긴 편이다. '재판 찍는다' 연락 왔을 때도 손댈 게 별로 없었다.

-이번 소설집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얽혀 있는 소설이 있다면.

▲현실에서 모티프를 얻으니 이 소설 내용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낙타주머니'에서는 남자들의 우정을 써 보고 싶었다. 실제 친구 죽음 때문에 죄책감도 많이 느꼈고. '고래등'과 '제비를 기르다'도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래등'의 경우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일생이 결국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제비를 기르다' 경우도 남자가 끝에 작부의 품에 안겨 운다. 이 소설을 읽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이 있다. 자기도 마음속으로 울었다고 한다. 남자도 울고 싶은 거다. 아내 앞에서나 자식 앞에서는 울 수 없으니. 카타락시스처럼 뭉쳤던 게 풀리는 대목이다.

-'제비를 기르다'에 나오는 작부 '문희'의 비중이 큰데.

▲직업적으로 천대하지만 나는 작부라는 직업이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의 연인이고 누나고 어머니고. 위안을 주는 기능으로서 그 시대에 가지는 사회적 기능이 있었다.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 사람에게 남겨진 건 술과 담배 소진한 육체뿐이다. 그 고귀함에 대한 헌사다. 다시는 거듭하지 말라는. 화자는 '문희'에게서 최초의 여성, 연인, 모성을 동시 발견한다. 한복, 음식, 화장품 냄새, 포옹과 뽀뽀. 내 연령대에는 영화배우 문희에 대한 선망이 있다. 그 이미지와도 겹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애착가는 소설이나 인물캐릭터가 있다면.

▲일단은 '탱자' 같다. 호평도 받았고, 집사람도 이 소설이 여자의 일생이다 보니 공감대가 생긴다고 했다. 이 소설로 시야가 좀 더 확보된 느낌이다. 최근작인 '마루밑 이야기'는 20~30대 여성들을 등장시켜 여성들 간 세대차 공감대를 그려 여성 삶의 무게감을 다뤘다. 전에는 남성 주인공이 아니고서는 소설 써가는 것에 엄두도 못 냈다. 이제는 여성 삶에 대해서 이해하는 깊이를 가진 거 같다. 사실 전에는 남성 위주 시각에서 글을 썼다고 여성들에게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선악 또는 흑백 등 뚜렷한 이분법적 특징이 없다.

▲저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 소설에서는 악함과 선함이 등장하는 게 통념이다. 그러나 난 사람을 우아하게 그리고 싶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더라도. 그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게 제 소설의 반이다.

-큰 사건도 없는데.

▲읽을 땐 재미있지만 외려 그건 거짓말 같다. 이야기로서의 소설은 방송대본이나 드라마대본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사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로 옮기기 힘들다. 그게 문학의 길이라 생각한다. 내면을 읊는 것. 영화나 드라마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 책을 이미지로 표현하라면 가을 겨울바람이 계속 불고 있는 느낌이다. 바람이라는 건 방향이 있다. 과연 이 책 속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걸까.

▲아득한 서쪽 어디?(웃음) 어디에선가부터 삶을 받아서 살고 또 그 삶을 이어주는 게 사람의 삶이다.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일 것이다. 먼 선조로부터 온 생의 쓸쓸함과 고독함이 유전되면서 불어오고 불어가는 것 같다. 저 자신이 불교경전이나 신화 등의 오래된 고전들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정취나 무게감 잃지 않으려 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시선에 미추가 없고 누구나 똑같이 소중한 개인이다. 사람이나 세상을 분별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래선 안 된다.

-지난 기억을 소재로 하고 풀어낸 소설들이 많다. 추억이란.

▲삶은 추억을 살아가는 거다. 추억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추억이 없는 내일을 생각한다면 존재 자체가 아니다. 제 인생 자체가 유한하니까 추억으로 소설로서 남기려는 의지도 있다. 소설가로서 살면서 어려운 점도 많지만 추억이나 과거를 복원할 수 있다는 거는 좋다.

-소설 주인공들이 늘 여행길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제가 역마살이 있다. 집에 오래 있으면 우물 속에 갇힌 것처럼 불안하다. 기로에 서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움직임 자체가 삶 자체의 표현이다. 제 소설 속 인물들도 길 위에서 사라지거나 다시 돌아온다. 저 자신도 20~30대에 비해서는 많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정지한 상태에서의 시선도 생기는 건 같다.

-여행과 글쓰기의 관계를 짚자면.

▲저는 여행이 몸에 배여 전에는 주로 여행지에서 취재해 가면서 글을 썼다. 집에서 쓴 적이 없다. 그리고 소설을 끝내고 와도 여행을 다녀와야 환기가 된다. 숨쉬기 같다. 그러면서 길 위에서 소재를 많이 얻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쓴 소설들을 보면 울릉도 독도 빼고 안 쓴 곳이 없다. '대동여지도적 글쓰기'다. 이 땅을 사랑하니까. 철저히 한국적이다. 산과 바다가 없으면 얼마나 황폐할까. 쓰레기로 지저분해진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 사람은 산과 바다에 갈 자격이 없다. 산에 있으면 저절로 기뻐지고 바다와 같이 변하는 것 앞에서 몸을 맡기고 있으면 영원해진다. 자연 자체가 모국이다. 산불 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다.

-글은 단숨에 쓰는 편인가. 아니면 삭혀 가면서 쓰는 쪽인가.

▲삭혀 둔 걸로 쭉 쓰는 스타일이다. 시작이 굉장히 힘들다. 앞뒤 정도는 잡아놓고 기다리다 보면 써도 되겠다고 확 몰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쓰기 힘들다. 그러면 단숨에 쓴다.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밑줄 긋고 싶은 문구가 꽤 많다.

▲정확한 문장을 쓰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다소 서정적이고 스산하고 한번 틀어 말하고.

-평범하지 않은 제목들이다.

▲예전엔 화려했다. 근래엔 '탱자'처럼 명사형 제목이 많아졌다. 멋 부리기가 없어지고 의미는 명확하게. 읽고 나서 제목에 울림이 온다면 된다. 제목이란 사람 이름하고 같다. 이름이 무의식적으로 많이 규정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그 이름을 부르다 보니 이름에 사람이 따라간다. 몇 프로라고 이야기 하는게 무의미 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림들 가운데 '무제'가 많다. 무제라니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말이 안된다 생각한다.

-'윤대녕' 이름 석 자도 평범하진 않다. 맘에 드는지.

▲한학하시던 할아버님이 지어주셨다. 한글로만 보면 괜찮은데 한문 뜻은 촌스럽다. 큰 大자에 평안할 寧자를 쓴다. 크게 평안해라는 뜻이다. 할아버지가 나의 평탄치 못함을 예감하고 바람막이로 이름을 지은 거 같다. 그럼에도 내 삶은 평탄치 못했다. 늘 길에 나가 있는 데 그게 평안한 인생이겠나.

-이번 소설집에서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죽음이란.

▲불교관에 많이 기대고 있다. 그리고 마흔 넘으니 삶 자체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현재를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야겠더라.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다는 긴장감이 개입되니 삶이 활력을 얻는 것 같다. 죽음이란 윤회의 고리에 육신의 옷을 벗는 것. 그리고 자식에게 삶이 이어지는 것. 어떤 식으로 죽음을 대할 줄은 막연하지만 이런 준비 자체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삶 자체에 대한 완벽한 리얼리티다.

-당신은 낙관론자인가 비관론자인가.

▲전에는 비관이나 슬픔에 많이 도출돼 있었다.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중간 상태다. 많이 담담해지고 고요해졌으며 관계에서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생물학적 나이가 가져다주는 깨달음이 아닐까.

-이 소설이 당신 소설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어떤 전향점이 될 것도 같은데.

▲전향점도 본인이 선택하는 건 아니고 독자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 같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비평가를 비롯해 모두 그렇게 몰아가는 거 같다. 어떤 시대의 마무리로서 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소설가로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불가사의하게도 살아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검소함이 아름다우니 검소하게 살고 있다. 자기관리가 여러 가지로 필요하다. 대학원 강의도 해봤고 문화센터 강의 제의도 받아봤는데 글 쓰는 데 지장 받는다. 집안이 교육자 집안인데 나는 그 피를 받지 못했는지 가르치는 것보단 글 쓰는 게 좋다.

-국민연금처럼 작가연금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로서의 사회적 안전장치가 전혀 없으니 다들 불안해한다. 그런데 작가연금 수혜 범주가 모호하다. 등단하면 작가인데 몇 권 이상씩인지. 시험을 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중앙적 평가로 머물 소지가 크다.

-당신에게 소설이란 어떤 존재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유하는 방식이다. 꿈을 꾸며 상처난 추억을 봉합하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소설 안 쓰고 살 수 있을까. 어떨 땐 글쓰기 노예가 된 것 같지만 쓸 때는 행복감 느낀다.

-앞으로 글쓰기는.
▲이번 주까지만 인터뷰 하고 글 쓰는 일상으로 돌아갈 듯하다. 단편 2편 청탁을 받아놓은 상황이다. 평소에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단조로운 패턴을 유지한다. 이번 봄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들어갈 생각이다. 지난 번 한 달 내내 소설만 잡고 있었더니 확실히 집필력이 생기고 정말 딱 글 쓰게 해 놨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일본소설이 잠식해 큰일이다. 같은 모국어를 쓰면서 같은 공감대를 나눌 기회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착잡하다. 한 사회에서 작가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다. 요즘엔 IT 시대고 영화도 있지만 삶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는 존재는 역시 작가 아닌가. 우리 작가의 소설을 관심 갖고 읽어줬으면 한다.

/사진·이상운 기자 photo98@pc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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