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박완서 신작 산문집 '호미'

“내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어느덧 일흔일곱에 이른 소설가 박완서의 고백이다. 그녀의 이같은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신작 산문집 '호미'(열림원)가 독자들의 마음 문을 두드린다.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자락에 살고 있는 박완서의 즐거움은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그루터기만 남겨두고 싹둑 베어버렸으나 죽지 않고 새싹을 토해낸 목련나무에 대고는 “나를 용서해줘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을 건다. 일년초 씨를 뿌릴 때는 “한숨 자면서 땅기운 듬뿍 받고 깨어날 때 다시 만나자고 말을 건다. 일년초가 비를 맞아 쓰러져 있으면 “바로 서 있으라고 야단”도 친다. 오늘도 박완서는 새벽의 조용한 마음밭으로 나가 꽃과 나무들의 출석부를 부른다. 상사초,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 매화, 살구, 앵두, 조팝나무……

여기에 박완서는 종말이 새로운 시작을 불러오는 순환의 법칙을 일깨워준다. “작년에 그 씨를 받을 때는 씨가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자연의 엄숙한 순환인 시작과 종말 앞에서, 박완서는 겸허히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

이와 함께 박완서는 유독 맑고 아름다웠던 영혼들을 가슴 찡하게 추억한다. 그녀보다 앞서 세상을 살다갔거나 여전히 우인(友人)으로 존재하는 어른들의 삶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하는 상상력의 힘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준다. 박완서의 시어머니 되시는 분은 “종교도 없었고 학교도 안 다녔지만 인간을 아끼고 생명을 존중하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신 분”이었으며, 철저히 유교적이었던 할아버지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사람의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대처에 나가 있는 손자들이 방학해서 내려와 있는 동안 차례도 지내고 음식 장만을 하기 위해 양력설을 쇠도록 한 진보적인 분이셨다.

어디 그뿐인가.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인 역사학자 이이화, “복 많은 사람” 김수근, “돼먹지 않은 걸 꾸짖고 혐오하실 때는 망설임이 없으”시던 시조시인 김상옥, “이름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지곤” 하는 소설가 이문구 선생에 대한 박완서의 존경과 그리움이 주는 깨달음은 값지다.

이 책 '호미'는 70여 년 인생밭을 일궈 온 박완서의 농익은 깨달음이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그 세월들이 낳은 애증과 나락의 순간마저도 그녀의 너그러운 만물사랑으로 묵직한 울림이 되고 있다. (열림원 펴냄.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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