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하강이 현실화되고 있고 국제 유가 등 대외요인의 불안이 지속되고 있지만 한국 경제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이런 저런 대책을 내 놓고 있지만 정부 부처 간, 당정 간 이견만 노출될 뿐 구체적인 대책은 물론 방향조차 제대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는 타이타닉호 처럼 자꾸 가라앉고 있는데 정부와 여당, 중앙은행, 재계는 불신과 반목으로 경제살리기를 위한 통일된 해법을 내놓지 못한채 소모적인 논쟁에 세월을 보내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와 여당의 대책이 무엇인 지, 뭘 하겠다는 것인 지 혼란스럽다"며 "확실한 것은 대외 여건과 국내 경기가 불안하다는 것 뿐"이라고 우려했다.

◇경기하강 현실화..유가 100달러 전망까지

민간 전문가들의 진단대로 경기 하강 기미는 이미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2.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전분기 대비 증가율은 5분기 만에 최저인 0.8%에 그쳤다.

현재의 경기상황을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3개월 연속 떨어졌고 앞으로 경기를 예고하는 선행지수 전년 동월비는 5개월째 하락하고 있다.

취업자 증가 수는 3개월째 20만명대에 그치고 있고 이달 중에 발표될 7월의 산업활동동향.서비스업활동동향 등도 전월보다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7월의 집중호우 때문이다.

하지만 8월 경제 지표들이 호전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심리 지표도 좋지 않고 국제 유가의 상승세가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기대지수는 6개월 연속 하락하고 있으며 월 소득 400만원 이상 고소득층의 소비심리도 기준치 밑으로 떨어졌다.

국제 유가(두바이유)는 지난 8일(거래일) 배럴당 72.16달러로 사상 최고가를 경신한 뒤 테러 우려에 따른 항공기 수요 감소 예상으로 주춤하고 있지만 테러 가능성이 높아지고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면 장기적으로 80달러까지 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은 중동 등 산유국들의 정정 불안으로 국제유가가 100달러까지 오를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고 석유 전문가들도 100달러는 가능성이 아니라 시간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당.정 경제살리기 대책 홍수

여당과 정부는 이에 따라 경기 회복 기조를 이어갈 수 있는 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여당은 이른바 뉴딜을 통해 재계가 신규 투자 확대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써 준다면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각종 규제를 개선하고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재계와 합의했다.

출총제는 '개선'한다는 문구였지만 사실상 '조건없는 폐지'에 무게가 실렸고 경영권 보호수단으로 황금주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정부도 투자활성화를 위해 기업환경개선에 대한 청사진을 9월까지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창업.공장설립, 유통.물류, 환경 등 10여개 부문에 대해 법률.행정.조세.노동.금융 등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제도를 기업하기 좋게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침체에 빠진 건설경기 부양도 정도는 다르지만 여당과 정부 모두 빠뜨리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여당은 민간 건설경기가 위축돼 있다면서 관련 규제를 획기적으로 풀 것을 정부에 주문했고 정부는 올해 하반기 공공부문에서 작년 하반기의 13만채보다 많은 20만채의 주택을 착공하겠다고 밝혔다.
◇부처간, 당정간 논란으로 혼란 가중

경기 부양을 위한 각종 대책과 계획은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약발이 먹힐 주요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대신 경기 진단에서부터 재벌정책인 출총제, 경영권 보호 대책, 수도권 규제 완화, 성장 전략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르기까지 부처 간, 당정 간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특히 여당이 재계와의 `뉴딜'에서 제시했던 경제인 사면이 무산되자 재계에서는 여당의 다른 약속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혹시나'했지만 '역시나'라는 반응이다.

경기에 대한 당정의 시각차도 크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경기가 회복기 중 일시적인 조정을 받고 있다는 시각이지만 여당은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출총제는 공정위와 재계 간 대립에 이어 공정위.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 등 관계부처 간 대립과 공정위와 여당의 견해 차이, 여당 내부의 이견으로 극한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 얘기가 맞는건지 국민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권오승 공정위원장은 환상형 순환출자 금지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재계는 순환 출자 금지가 출총제보다 더 강한 규제라면서 조건없는 출총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재경부와 산자부도 "조건없이 폐지하는 것도 대안"이라며 공정위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여당 내부의 상황도 비슷하다.'뉴딜' 행보에 나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경제5단체와 "출총제 등 기업투자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각종 규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했지만 여당의 서민경제추친위원회 소속 채수찬 의원은 순환출자를 향후 10년 간 단계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권 보호 장치에 대해서도 김 의장은 "적대적 M&A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보겠다"고 했지만 재경부는 "현재의 장치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추가 대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수도권 규제완화에 대해서도 김 의장은 긍정적이지만 권오규 경제 부총리는 "균형발전이 우선돼야 한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핵심 과제로 강조하고 있는 한미 FTA를 둘러 싸고도 정부는 적극적이지만 여당에서는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 "경기인식부터 공유해야"

전문가들은 당정 간, 정부 부처 간 정책 혼란이 경기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하고 경기에 대한 인식 공유와 함께 정책 조율을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거시경제팀장은 "경기가 꺾였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는데 정부는 아직까지 괜찮다는 태도고 여당에서는 경기부양의 유혹을 느끼고 있다"면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해법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여기저기서 경제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경제가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의미"라며 "당.정이 의욕적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유 상무는 하지만 "과거와 달리 정책 조율 기능이 약화돼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당.정.청이 머리를 맞대고 경기에 대한 인식부터 공유해 정책의 방향와 우선 순위를 가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석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출총제를 예로 들면서 "폐지하려면 폐지에 따른 비용과 기업 투자 촉진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사전 분석이 필요하다"면서 "비용과 이득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돼 정부 내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방향성 없는 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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