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략 바꿔 전방위 공세 현실정치가 변신

민주노동당이 달라지고 있다. 문학소녀 같은 낭만주의자에서 노련한 계산 솜씨가 돋보이는 현실정치가로 변신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탄생 직후부터 마이너리그를 누벼왔다. 기존정당이나 유권자들이 민노당이 크도록 도와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노당 스스로도 마이너리그를 고집하는 듯한(즐기는 듯한?) 인상을 줬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발언으로 대표되는 서민정당의 이미지, 노동자 집단의 이익 추구라는 타이틀로 고집스럽게 안 되는 선거에 출마와 낙선을 거듭해 왔다.

어느 정당보다도 강한 기초당원제를 고집하는 정당, 당원간에 모여 학습을 하는 정당으로 명성을 날리며 소수정예를 추구해 왔다. 또한 NL(자주민주)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노당 구조상, 일반 국민들은 민노당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을 느껴온 것이 사실.

이런 민노당이 약진하기 시작한 건 정당명부제 도입 이후다. '사표 방지 심리'가 상당 부분 줄어들게끔 선거제도가 개선되면서 표가 몰리기 시작했다. 민노당이 정당명부제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7대 총선에서는 (비례 대표이긴 해도) 대거 여의도에 진출, 본격적으로 원내 정당의 몸매를 가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노당은 원내 정당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 하면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원내 활동 내내 민노당은 고객 감동을 실현하지 못했다.

여기에 지리멸렬한 당내 갈등, NL과 PD간 기싸움도 당원과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줬다. 당원 모 씨는 “논쟁적이기만 한 정당, 그러나 자신들이 외쳐온 서민 지향 정책을 내놓는 데에는 성공적이지 못한 정당으로 낙인찍혔다.”고 자평한다. 이런 여론이 가시화된 것은 지난해 4월에 치러진 재보궐 선거. 민노당은 자신들이 잃은 울산에 후보를 세웠으나 결국 탈환에 실패, 한 석을 깎아 먹고 말았다.

이런 민노당이 대선 정국을 계기로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자발적으로 마음을 먹었다기 보다는 변신을 강요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지난달 20일 무렵부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주고받기식으로 주택법, 사립학교법을 손보기로 결정짓는다는 정보가 흘러나오자 민노당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민노당의 전사적 기질을 일깨우는 외부적 요인이 닥친 것.

이에 따라 민노당은 발빠르게 전쟁 모드로 돌입했다. '이슈 선점', '텃밭(고정표) 확보', '퍼셉션(perception) 전략과 이미지 메이킹' 등 전방위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더욱이 이런 노력들이 과거와 같은 싸움닭 스타일이 아닌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게 눈에 띈다. 즉 '타협의 여지 만들어 두기'가 하나 추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협상하기 쉬운 민노당으로 이미지를 재구축한 점부터 살펴보자. 민노당은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결국 2월 27일 아침 주택법, 사학법 빅딜에 들어갈 것이 확실해지자 당일 아침 권영길 대표와 자당 국회의원들을 동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실에 '난입'함으로써 강력히 항의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난입'은 국회사무처 직원들과 일부 기자단 사이에서 그날 오간 표현일 뿐이라는 점이다. 장영달 의원측도, 민노당도 난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반기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 난입은 난입이면서 난입이 아니었다고 정리할 수 있게 됐다.

거센 항의로 점철된 방문이었지만, 이 날의 대화 속에는 평소 민노당이 즐겨 쓰던 언사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가 있었고, 장영달 의원은 민노당이 보낸 이 미세한 신호를 포착해 두었다. 그 결과 주택법과 사학법 개정 마당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의 지위를 악용, '몽니'를 부리자 과감하게 한나라당이 협력하지 않으면 타당과 연합 처리도 불사한다는 발언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불과 사나흘 새 강경기조로 갈아탈 수 있는 자신감은 민노당이 실어준 셈이다.

이런 열린 협상 마인드는 주택법 빅딜이 결국 깨진 날,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과 우리당이 서로를 성토한 뒤 민노당 부대변인이 정론관(국회기자실)에 우아하게 들어섰다. 민노당측은 이 기자회견을 통해 '양당 모두를 비판'하면서도 한나라당은 원내 제 1당으로서 책무를 다하라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열린우리당을 가상파트너로 설정, 항상 채널은 열어두겠다는 메시지를 더 노골적으로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퍼셉션(이미지 메이킹)은 심상정 의원(심 의원은 지난 8일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이 가장 열성적으로 커버하고 있는 영역. 심상정 의원<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비내각(Shadow Cabinet)으로 당조직을 개편하자는 주장을 해 왔다. 예비내각은 영국식 제도로 당 간부 전체가 국가운영에 대한 거시적 마인드를 갖고 언제든 국정운영에 들어갈 수 있게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다.

'준비된 대통령, 정당'으로 퍼셉션 전략을 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심 의원은 또 소득 재분배가 아닌 '자산 재분배'를 주장, 이전 정부, 여타 정당과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교육, 금융제도 등 시스템 이용권을 저소득층에게 더 넓게 제공, '사회지위 향상의 사다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 서민정당으로 색깔을 한층 확실히 해 양극화심화로 늘어난 정치적 냉소층을 향해 손짓을 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노회찬 의원<사진>도 퍼셉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 노회찬 의원측은 대선 출마 선언에 앞서 '87인의 동반자'를 선정, 대외 홍보 전략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을 계승한다는 명목과 함께 사회 각층의 대표자들을 포섭, 전방위에 표를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다.

민노당이 요새 이슈 선점에 열심이라는 점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강기갑 의원의 '감사원이 FTA 추진에 걸림돌이 되는 깐깐한 농림부를 표적 감사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국회로 초청, '일본인들에게 차별, 학대받는 조선계 학교 학생들의 문제'를 거론했다.

일부 정치부 기자들은 '색깔론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민노당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분위기를 만들며 타당에 앞서 좋은 이슈를 선점해 버렸다. 민노당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뱃심있는 공략이었다는 게 사후평가.

아울러 '노무현의 남자 정태인 전 수석'을 심상정<사진> 캠프가 영입해 버린 것도 이슈 선점 면에서 화제다. 민노당 관련 보도에 '짠' 편인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도 이 문제는 관심있게 보도할 정도로 시선을 끄는 문제였다.

정태인 전 수석은 참여정부 초기, 경제자문의 핵심인재였던 사람. 그런 그가 참여정부와 척을 지게 된 것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정 전 수석의 소신과 노무현 대통령의 FTA 집착이 충돌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을 살피던 심상정 의원측은 재빨리 정 전 수석을 영입, 한미 FTA 문제와 관련된 발언이 나올 때마다 자동적으로 민노당이 언급되도록 책갈피를 꽂아뒀다.

텃밭 넓히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 항목이다. 노회찬 의원실은 카드 수수료 인하 문제를 거론, 영세상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상황. 월급생활자와 노동자층이 아닌 곳에서 이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는 상황은 이전의 민노당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 그런가 하면 강기갑 의원실에서는 FTA 반대 집회마다 따라다니며 열성으로 연설, 농심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변신으로 인해 민노당은 이번 대선에서 (당선까지 장담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의미있는 득표를 할 것으로 점쳐지며, 특히나 18대 총선에서도 대약진을 자신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변신으로 민노당이 당장 성장세를 즐기는 상황이 된 점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노당 자체의 컬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이런 우려를 하는 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의 대약진과 몇 년 후의 처참한 추락, 탈당 러시가 민노당에서 재연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실제로 열린우리당은 탄핵 정국에서 많은 인물들을 영입해 일약 원내 1당으로 떠올랐지만 우파적 특성이 강한 안개모부터 친노파로 분류되는 참정연, 개혁적 성향이 강한 임종인 의원까지 너무 넓은 스펙트럼으로 퍼져 결집이 안 되고 모든 이슈마다 좌충우돌 자중지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당은 정책적으로 동력을 끌어내지 못했고 선거마다 패배하며 한나라당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예를 들어 정태인 전 수석 영입 같은 경우 단기적으로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대단한 지원세력으로 보이지만(한국사회당 최광은 대변인은 이 문제에 대해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략적으로는 의미있다고 본다”며 효과를 인정했다.)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수 있는 트로이목마가 될 수 있다는 기우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심상정 의원측은 “정태인 전 수석은 FTA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한중 FTA, 한일 FTA 먼저 해 보고 한미간에는 나중에 하자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로부터 대중을 보호하자는 모토를 견지해온 민노당으로서는 영입 자체가 안 맞지 않는가”라는 본지 기자의 질문에 살짝 곤혹스런 반응. “심 의원이 FTA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대화와 정보공개를 통한 협의로 하는 것은 동의한다”는 교과서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즉 정치판에서 구르며 나름대로 노련해진 민노당이 비상하고 있지만, 비상을 위해 단 날개가 언젠가는 민노당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그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도, 결국 제 2의 열린우리당 사태와 같은 모습을 만들 우려가 있다.

노련해진 민노당이 달콤한 득표율의 맛에 취해 고유의 색깔을 잃을지, 일단 세를 불린 다음엔 전통적 지지자들과 신규 지지자들에게 모두 정보를 공개하고 겸허히 의논하는 자세를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영국 격언은 이 민노당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다.

민노당 지지자들과 국민들은 민노당이 성장에만 집착하다가 고유 색깔을 잃는 일 없이 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른 정당과 건전한 긴장 관계로 선의의 경쟁관계를 계속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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