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코리아=한윤희 칼럼] 손학규 새 민주당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은 참여정부 임기 막바지에 접어든 2007년 3월. 그는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새 길을 창조하겠다. 대한민국을 등질 수 없어서 한나라당에 등을 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군정의 잔당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한나라당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계속된 탈당사(辭)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누린 모든 영예를 반납한다”고 말한 순간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집권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지 14년여 만의 일이었다.

본인 말마따나 3선 국회의원, 장관, 2선 경기도지사로 적잖이 영예를 누린 손학규의 탈당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더구나 탈당 직전까지 그의 언행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는 한나라당을 자랑스럽고 꿋꿋하게 지켜온 주인이며 기둥이다. 나의 행적을 봐라. 의연한 자세로 걸어왔고 정도를 걸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 목적이고 역할이다. 나는 한나라당 자체다…”

손학규의 탈당변(辯)은 결연했지만 그래서 여론은 더 냉랭했다. 사람들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산이 보였으면 절대 탈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봤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을 흔들어대며 이합집산 신당창당을 꾀하던 일부 세력만 그를 환호했다. 불쏘시개가 요긴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논평은 나름대로 정곡을 찔렀다. “경선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외에 어떠한 합리적 기준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철새의 도박을 지켜봐야 하는가.”

'식물대통령'을 찾아간 '보따리장수'

노무현은 참여정부에 줄곧 대립각을 세웠던 손학규의 탈당을 '보따리장수'에 빗댔다. 보따리 정치, 즉 원칙을 파괴하는 사람은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었다. 그는 열린우리당 탈당 통합신당파에 손학규가 힘을 실어줄까 경계하던 터였다. 손학규가 통합신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것에 대해 노무현 측은 정체성을 문제삼아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 반발로 나온 것이 '노무현 식물대통령' 발언이다. 손학규는 노무현을 무능한 진보의 대표로 지칭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책상 앞에 앉아 이메일 보낼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응수했다.

한나라당 탈당 후 손학규는 한나라당 14년 전력과 관련해 사과의 뜻도 밝혔다. 반(反)한나라 성향의 유권자들을 향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한나라당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상했던 분이 많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면서 그 마음의 빚을 대선 승리를 통해 갚겠다고 했다. 그 약속은 불발로 끝났다.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들 쪽으로 반성의사를 피력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최근 손학규 대표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손 대표는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을 때 그에게 인간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결례를 범한 사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권교체로 노 전 대통령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고, 취임 인사차 봉하마을을 방문해 똑같은 말을 했다면 어떤 반응이 이어졌을지 궁금하다. 포옹이라도 한 뒤 회포를 나눴을까.

우리 '걸레정치'에는 지역주의와 함께 유권자들의 건망증이 한몫 한다. 그것 때문에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며 변절 야합 따위를 정당화하며 권력을 거머쥐는 '성공사례'를 자주 봐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경선 승리도 뭇사람에게 귀감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지상주의가 계속 극성을 부리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정사회 구현은 요원한 구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국민 눈높이에 맞춰 정치하고 있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이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噴飯, 너무 역겨워서 입에 넣어 씹던 음식이 뿜어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된다. (조지훈 '지조론', 1960년)

50년 전에는 안목들이 탁월했을지 모르나 요즘 기준으로 보면 조지훈 시인은 우리 국민의 정치수준을 한참 잘못 짚은 것 같다. 국민을 등신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엄두도 못낼 일들을 밥먹듯 하는 사람이 수두룩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것이 국민 눈높이에 맞춰 하는 정치라면 딱히 아니라고 주장할 일도 못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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