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으로 생후 100여 일 만에 헤어진 아들 만나

▲아들 만난 국군출신 리종렬씨
북측 최고령자 리종렬씨(90)는 30일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남측의 아들 이민관씨(61)를 만나 "60년간 하루도 잊지 않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민관씨는 국군 출신 이산가족인 아버지 리씨에게 "돌아가신 줄 알고 지금껏 제사도 지내왔어요"라며 "조금만 일찍 만났으면 어머니도 볼 수 있었을텐데"라고 아쉬워했다.

리씨는 한국전 참전으로 생후 100여 일 만에 헤어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관아… 민관아…"라고 이름만 부를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리씨의 남측 동생 이종식씨가 "형님, 식이 기억나지요? 나를 식이라고 불렀었잖아요"라고 묻자 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6남 2녀중 맏이인 리씨는 상봉장에 나온 동생 3명과 병원에 입원한 한명을 빼고 다른 동생 셋은 생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오후 3시10분부터 시작된 2010년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는 북측 리종렬씨를 비롯해 방영원(81), 리원직(77), 윤태영씨(79) 등 '국군출신 이산가족' 4명이 남쪽 가족들을 만났다.

'국군 출신 이산가족' 4명은 한국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처리됐으나 이번 행사를 앞둔 생사확인 과정에서 생존 사실이 확인돼 상봉이 이뤄졌다. 이들 4명은 정부가 정리해놓은 '국군포로'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은 이들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북 순창군에서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다가 국군에 자원입대한 것으로 알려진 방영원씨(81)는 남측 형수 이이순(88)씨를 만나 눈물을 흘렸다.

방씨의 형은 이미 28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방씨는 형수로부터 형의 작고 소식을 전해들은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만 훔쳤다.

1950년 가을 경북 선산에서 청도로 피난을 가던 도중 국군에 징집된 뒤 60년간 소식이 끊긴 리원직씨(77)는 이날 남측 누나 이운조씨(83)를 비롯해 남동생 원술, 원학, 원탁씨 등 4남매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상봉장에 나온 리씨는 형제들을 일일이 끌어 안은 뒤 "(남동생)원택이는 왜 안왔냐?"고 되묻기도 했다.

남측 동생 이원술씨가 "여기에는 5명 밖에 오지 못해요. 남한에 다 잘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리씨는 "아버지 산소에 한번도 못 가보고…"라고 말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다른 국군 출신 이산가족 윤태영씨(79)는 남측에 살고 있는 4명의 남동생들과 뜨겁게 해후했다.

윤씨가 동생들과 반갑게 포옹한 뒤 "내가 죽은 줄 알았지?"라고 농담을 건네자 모두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막내 동생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씨의 낯빛은 이내 어두워졌다.

윤씨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넷째 동생 상길씨(68)의 얼굴과 턱을 쓰다듬으며 "네가 나를 제일 많이 닮았다"며 애틋함을 표시했다.

윤씨 형제들은 어릴 적 고향(경북 군위)에서 함께 물놀이를 하고 한문을 배웠던 이야기를 나누며 2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에 60년 세월을 담으려 애썼다.

윤씨가 할머니 산소를 잘 돌보고 있는지 묻자 동생들은 "성묘를 하며 잘 보살피고 있어요"라고 형을 안심시켰다.

동생들이 돌아가신 부친과 모친의 사진을 내밀자 윤씨는 "잘 가져왔다"고 고마워했다.

이날 행사는 남쪽 상봉단 436명이 앉아 있는 가운데 북측 노래 '반갑습니다'가 울려 퍼지고 북측 가족 97명이 상봉장으로 들어서며 시작됐다.

60여년 이산의 서러움을 뒤로하는 통곡과 서로를 부르는 아우성이 뒤엉켰다. 상봉장 뒤쪽의 남측 가족들은 북측 가족을 먼저 찾으려고 테이블의 번호판을 위로 치켜들고 앞으로 걸어 나오기도 했다.

남측 상봉단 최고령자인 김례정(96) 할머니는 북측 딸 우정혜씨(71)를 만나 장수한 기쁨을 누렸다.

상봉 직전 "딸 만나는데 좋기만 하다"던 김 할머니는 우씨를 보자마자 "너를 어떻게… 꿈에만 보던 너를…"이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씨는 "저는 잘 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하며 어머니를 안았고 이내 북측 가족사진과 20여개의 각종 훈장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남측 권윤씨(81)는 북측 동생 권준희씨(77)를 보고는 "기쁨이 한량없다. 꿈인가 생시인가 눈물 밖에 안 난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치매 초기 증상이 온 남측 권재희씨(91)는 휠체어에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북측 남동생 준희씨를 보고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북측 오빠 김현군씨(75)를 만난 남측 여동생 김옥자씨는 못본 새 할아버지가 돼버린 오빠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옥자씨는 "부모님과 오빠들이 모두 막내오빠 살아있는 걸 모르고 상심하다 돌아가셨다"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북측 김현군씨는 "그래도 누이동생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는구나"라며 누이동생을 달랬다. 현군씨의 남측 조카딸 김순녀씨는 처음 보는 작은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단체상봉 도중 한 남측 고령 참가자가 응급차에 실려 숙소로 후송되기도 했다. 북측 형님 성길용씨(79)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 남측 동생 성진수씨(76)는 단체상봉이 끝날 무렵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대한적십자사 의료진은 "우울증, 치매 증상이 있었던 성씨가 오래 앉아 있어서 힘들어했다"며 "혈압 등은 정상이라 큰 이상이 없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북측 노래 '반갑습니다'로 시작된 이날 단체상봉은 오후 5시께 노래 '다시 만나요'로 끝났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은 오후 7시께부터 금강산 온정각에서 진행된 만찬에서 60년 넘게 가슴 속에 품어온 얘기를 나눴다.

이산가족들은 이틀째인 10월 31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4시간 동안 가족별 개별상봉(2시간)과 점심식사(2시간)을 함께 한다. 이어 오후 4시부터는 금강산면회소에서 두 번째 단체상봉을 하게 된다.

남측 이산가족들은 상봉 마지막 날인 1일 오전에는 오전 9시부터 금강산면회소에서 작별상봉을 한 뒤 오후 1시 남측으로 돌아올 예정이다.【금강산=공동취재단/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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