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자세 폐기 자기색깔 어필… ‘당 리모델링’ 추진할듯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우측 사진>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우리당 중심의 통합 논의는 지지부진한 데다가, 민주당 등에서는 그를 비롯한 참여정부 관련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려는 눈치다. 그렇다고 국민 지지율이 높은 것도 아니다.

운동권 출신의 여타 우리당 인사들에 비해 균형잡힌 정치감각과 합리적 경제관을 갖춰 '한국판 제 3의 길'을 열 것으로 기대됐던 그가 이렇게 추락하게 될 줄은 참여정부 초기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바다.

◆대통령 신임을 잃으며 모든 걸 잃은 사나이

우선 그가 겪고 있는 큰 문제는 낮은 지지율이다. 범여권 지지세력이 대체로 2,3%의 저공비행을 하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우 당초 범여권의 가장 강력한 차기 계승자에서 지지도가 급락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당초 01년에 열렸던 예비경선에 노무현 현 대통령과 같이 나섰다가 조언자로 일찌감치 방향을 선회하면서 정을 돈독히 해 왔던 정동영 전 대표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17대 총선 대승 이후 장관으로 입각하는 등 화려하게 떠올랐다. 그와 그의 세력이 이른바 당권파로 불린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통일부 장관 재임중 그는 화를 입게 된다. 방북 후 성과를 청와대에 보고하는 대신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말을 흘리면서' 청와대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후문. 그의 당권파 세력도 2005년 초반 천정배 의원의 당직 사퇴 후 이화영 단일체제로 그대로 갈 것인지를 두고 재야파, 친노 라인 등과 대결하면서 세가 시나브로 줄기 시작했다.

최근엔 청와대-친노계와 정동영 전 의장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내딛게 된다. 연일 공방을 벌이게 된 것. 노무현 대통령의 공격을 받으면 모두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걸 생각하면(고건, 정운찬 등), 정동영 캠프가 느낄 당혹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공격 자체도 상처가 되지만, 정작 정동영 캠프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공격에 딱히 대응할 방법도, 같이 대응할 세력도 마땅찮다는 것. 정동영 라인의 모 인사는 “말려들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 있기도 어렵다”고 답답함을 토로한다.

친노나 유시민라인, 청와대의 경우 조직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정동영 전 의장 주변에는 이런 탄탄한 조직이 없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그를 따르는 의원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은 지금 범여권 통합의 마당에서 소용돌이가 치자 숨을 죽이는 상황이다.

결국 대통령과의 인연과 유대감으로 떠오른 정동영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대통령과 소원해짐으로써 모든 게 불안정해져 버리고 말았다.

◆천정배 前장관, 김근태 의원과 제휴도 쉽지 않아

그가 한때 천정배 대표 체제를 밀었던 만큼,생각하면 천정배 의원과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정동영 전 대표는 정치 활동에서 천 의원과는 좀 다른 길을 걸었다. 천 의원이 선명성을 강조하면서 '탈레반'이라고까지 일컬어진 반면, 정 의원은 정치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우파적 속성을 드러내는 등 명확하지 않은 갈지(之)자 행보를 보여 둘 사이 타협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정책적 구상은 당이 안정되고 그의 입지가 확고했다면 '제 3의 길'로까지 조명을 받을 여지가 있었다고 그의 지지자들은 안타까워 한다. 그러나 우리당이 정권 기간 내내 당내 많은 파벌의 관계로 혼란을 겪으면서 정 전 의장의 정치적 견지는 묻혀 버리고 말았다.

김근태 전 의장과도 현재 흉금을 터놓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주변의 이야기. 대통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청와대로부터 싸잡아 비판받는 상황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책 지향이 다르고 2005년 4대 개혁입법 무산 당시 당권파와 재야파가 갈등했던 전례 등 앙금이 없지 않다.

물론 DY 캠프 주변에선 공식적으로는 이런 난감한 지경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지난 1월 이래 종종 탈당론이 피어오른바 있고, 또 이번 5웧 들어서도 “우리당의 내부 사정을 봐서 가망이 없다면 22일경 우리당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소리가 DY 계열 일각에서 흘러나왔던 걸 감안하면 캠프 내에서도 '어렵다'는 인식은 분명 갖고 있다.

◆정동영표 구상 당당히 어필, '선명성 강조' 친노계와 대결할 듯

결국 연석회의도 물건너 가고, 민주당 등과의 통합론도 박상천 민주당 대표의 강경입장으로 어려운 상황에 정 전 대표가 택할 방법은 제3지대 소통합론 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조차도 '우리당의 2.14 전당대회 정신에 위배되지 않느냐, 창당주역이 당을 나가면 무책임하다'는 뒷말을 듣는 상황이다.

결국 현재로서 가장 적합한 방법은 당에 남아 그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친노 세력과의 결전은 각오해야 한다. 이 상황에 어느 우리당 관계자가 던진 조언은 의미심장하다. 친정동영 계열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 인사는 “선명성이 없는 정책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차라리 이대로 쭉 밀고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당을 깨면 따라나설 인사가 적겠지만, 당에 남아 세를 결집하면 구당권파가 뒤를 받쳐줘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현재 정동영쪽에 가까운 비례대표만 해도 20-30명선). 이번 박근혜-이명박 경선룰 대결에서 보듯, 당권을 잡았던 경험은 간단찮은 정치자산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상 정동영 라인도 이런 검토 하에 이른바 '우리당 리모델링'도 검토하는 상황이다. 친노를 배제한 우리당으로 서서히 개조한다는 것이다. 정동영 계열의 중심인사인 김현미 의원이 나서서 정동영식 리모델링설은 근거가 없다며 일축하기는 했으나, 이와 관련한 설이 많이 도는 것은 사실.

정동영 전 의장이 5.18정신이 5.16정신에 침해당하는 일을 막자고 14일 발언했고, 정세균 현 의장이 같은날 “창당 당시 사회통합적 시장주의를 내세웠는데 큰 성과를 내지 못해 반성한다”며 이 정책을 이어갈 뜻을 내비친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정동영 계열과 현지도부는 당을 사수하면서 민주-진보

정신을 이어가되, 경제관은 시장주의를 중심으로 하기로 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천명은 그간 선명성이 강한 친노, 구 개혁당 라인에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마침 영국에서도 '노동당이면서도 시장친화적인 기묘한 색깔의' 브라운 장관<옆사진>이 수상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정동영 전 대표도 차라리 브라운 장관처럼 자기의 중간적 색채를 약점으로 인식할 게 아니라 오히려 통합의 코드로 내세울 태세다. 한국과 영국, 두 나라의 중간지대 정치인들이 각각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이번달 말이면 대략은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이들의 성패 여부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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