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숭고한 희생 그리고 3인 체제

▲ 2008년 '6월항쟁' 20주년 기념 거리행진 모습(위), 이집트 민주화 시위 모습(아래)
[투데이코리아=박대웅 기자] 튀니지 '자스민 혁명'에 이어 이집트 '코샤리 혁명' 및 예멘의 반정부 시위까지 중동 지역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고 있다. 지난해 12월18일부터 현재까지 튀니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스민 혁명'으로 23~68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최소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튀니지의 과일노점상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로 촉발된 '자스민 혁명'은 튀니지의 높은 인플레이션 해결과 벤 알리 독재정권 추방을 주장했다. 튀니지 시디 부 지드에서 시작된 튀니지 민주화 운동은 24년간 장기집권해온 벤 알리를 사우디아라비아로 쫓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은 소셜네트워크(SNS)의 발달과 함께 중동지역은 물론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및 빈곤과 극심한 빈부격차, 부정부패로 몸서리치던 이집트는 '자스민 혁명'으로 크게 고무됐다. 1월25일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는 '코샤리 혁명'이라 불리며 30여년 장기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지난 28일과 29일 시위에서 무바라크는 무력진압을 선택했다.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이날 무력진압으로 최소 62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했다.

이 같은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는 24년전인 1987년 6월10일 대한민국의 '6월항쟁'과 닮아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한 달여가 지난 5.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서울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구심점으로 전국적인 민주화 투쟁을 시작했다.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명이 참가해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했다. 높아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87년체제'의 완성으로 정계는 물론 노동계 등 사회전반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된 이집트의 '코샤리 혁명'과 대한민국의 '6월 항쟁'의 공통점을 살펴 봤다.

# 민주화를 이끈 '영파워'

'6월항쟁'과 '코샤리 혁명' 모두 젊은층의 주도로 시작돼 재야와 종교계 등으로 확대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코샤리 혁명'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주로 사용하는 젊은이들이 SNS를 통해 현장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며 전세계를 향해 '카이로의 봄'을 외쳤다.

이집트 전역의 반정부 시위는 한 청년단체가 페이스북을 통해 국경일인 지난 25일 시위를 촉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9만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어 시위자들은 SNS를 통해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시위를 조직적으로 편성해 갔다. 또한 SNS를 통해 검거를 피하는 방법이나 최루탄 대응 요령 등을 공유했다. 특히 지난 28일 금요집회 후 가진 시위도 페이스북에 "금요 예배 후 거리로 나가자"는 독려 메시지가 있어 가능했다.

# '박종철' vs '모하메드 아테프' 피살

"'탁'하고치니 '억'하고 죽었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 열사의 사망을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물고문과 전기고문 사실이 부검의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집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5일 민생고 해결과 계엄령 철회 등을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27일 중대한 분수령을 맞이했다. 시나이 지역에서 베두인족 시위대 1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희생자는 17세 소년인 모하메드 아테프로 총에 맞은 후 동료 시위대에 의해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그가 총에 맞은 동영상은 현지 언론은 물론 'AP' 등 전세계 외신을 통해 긴급 타전됐다.

이후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이집트 경찰은 시위대 해산 및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몇몇 도시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계속됐다. 특히 수에즈에서는 당국이 시위대 시신 1구를 넘겨주지 않자 성난 시위대가 정부 건물을 불지르는 등 격렬히 항거했다. 대한민국과 이집트의 민주항거 모두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을 시발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된 공통점이 있다.

#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3인 체제'

1987년 '6월 항쟁' 후 대한민국은 '87년체제'를 완성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자발적 노조 건설 등 민주화의 길로 내달렸다. 특히 정계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3인 체제로 재편되며 그해 12월 16일 있을 대통령 선거는 전국민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1노2김'의 선거 국면은 '정치9단'으로 평가받던 '양김'의 단일화 실패와 지역감정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해 정권은 또 다시 군부 출신 정치인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이집트 역시 민주화 시위 이후 정국을 주도할 3인의 행방이 주목된다. 이집트의 미래를 짊어질 3인은 바로 오마르 술레이만 정보부장과 야권의 기수로 떠오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및 현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3인이다.

시위대의 퇴진 압박을 받은 무바라크 대통령은 29일 술레이만을 부통령으로 내세워 진화에 나섰다. 정보기관 출신인 술레이만은 지난 1995년 에디오피아 방문 당시 무바라크를 암살위기에서 구하며 2인자 자리를 굳힌 정부 핵심 관계자이다. 최근 이스라엘 및 중동 국가 평화 협상 등을 중재하며 협상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집트 야권과 시위대는 술레이만 임명에 "술레이만도 무바라크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며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급변 사태를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은 미국의 포석이 내포된 것이 아니냐며 "무바라크나 술레이만이나 미국의 앞잡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이집트의 미래는 무바라크 현 대통령의 향후 거취에 따라 급변할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의 하야 요구에도 퇴진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무바라크는 최근 국영 TV 방송연설을 통해 실업 억제, 일자리 창출, 물가상승 억제 등 경제난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꼽겠다며 퇴진 불가 의사를 전했다. 영국의 BBC는 최근 "무바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쫓겨난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전처를 밟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미국도 권력 공백이 생기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 역시 "최근 이집트 군부가 무바라크를 보호하고 시위대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군은 이집트와 무바라크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고 전하며 무바라크가 퇴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LA 타임스와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포스트 무바라크'체제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로써 향후 이집트 정국은 무바라크의 거취에 따라 큰 변화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시위대로부터 정부와 협상 중재자로 선임된 엘바라데이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향해 "즉각 이집트를 떠나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넘게 해외에 체류한 사람이 이집트 국내정세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비판의 목소리 역시 존재한다. 특히 지난해 이집트 정치 개혁을 시도했지만 힘없이 분열하는 야당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국외를 떠돈 엘바라데이 이기에 다시금 야당을 결집하고 시위대의 전폭적 지지를 얻을지 불투명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젊은 세대의 열망과 숭고한 희생 그리고 민주화 시위 후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등장한 '3인체제' 등 이집트와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은 묘하게 닮아있다. 세계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독립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사냥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에 전세계는 대한민국의 저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를 지켜보며 세계 4대문명의 발생지답게 민주주의 확립을 통해 다시 한번 인류역사 속에 이집트의 저력을 꽃피우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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