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명지대학교 교수, 한국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악마화’ 된 단어,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참으로 고약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올 봄 카이스트에서 자살 사건이 잇따르자 대자보가 붙었다. 대학 당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남표식’ 개혁에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진정 바랐던 것은, 학사운영의 고삐를 늦춰달라는 것일 수 있다. 반값 등록금 촛불시위 피켓에도 신자유주의 반대가 등장한다. 반값 등록금의 명분은 '교육기회의 확대’이다. 하지만 속내는 등록금 경감이라는 '자기 몫’ 챙기기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악마화’는 최근의 소득 양극화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야기되었다는 주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자유주의가가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그리고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부를 뺏어갔기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게끔 하는 주술(呪術)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약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냉혈적인 경쟁’으로 등치(等値) 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경쟁을 일부 제한해야” 한다는 사고가 그렇게 해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경쟁에 대한 오해로 인한 치명적 정책 오류들

그러나 양극화는 신자유주의와 무관하며, 근래 우리 정부가 택한 경제정책 때문도 아니다. 양극화의 원인은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생산구조’의 변화와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국제 분업’의 심화에 있다. 신자유주의, 좁게는 '경쟁’에 대한 오해는 치명적인 정책오류를 낳는다. 경쟁을 제한할 때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경쟁에서 밀리는 '사회적 약자’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는 그 작명이 갖는 마력으로, 정치적으로는 이미 강자이다. 사회적으로 다수를 이루는 이들을 '표’라면 사지(死地)라도 뛰어들 정치인들이 놓칠 리 없다. 그들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은 그렇게 해서 태동된다.

기업형 수퍼마켓(SSM) 규제를 복기해 보자. 대기업 유통체인이 들어와 중소상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간다는 것이 규제의 배경이다. 그러면 지역상권을 위해서 국민들은 고비용을 지불하면서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유통산업의 근대화는 뒤로 미루어도 되는가? SSM 규제의 수혜자는 골목상권의 예컨대 담배 가게 같은 영세 상인들이 아니라, 제법 규모를 가진 중간규모의 수퍼마켓 주인일 것이다. 이들 이해관계자가 규제당국을 '포획’한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소비자이다.

대기업 유통업체가 만든 5,000원짜리 '통큰 치킨’도 마찬가지다. 통큰 치킨 판매중단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쪽은 '프랜차이즈’ 치킨점이다. 가장 큰 손해를 본 쪽은 긴 줄을 마다않고 기다릴 용의가 있는 저소득층 서민들이다. 정책당국은 '경쟁’이 아닌 '경쟁자’를 보호한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소비자를 위해서라면 고비용 유통 구조와 낙후된 상권을 근대화해야 한다.

소비자의 이익은 어디로 갔는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의 정책사고가 그것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는 '자가당착’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맞다면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 대기업은 저절로 '시장의 힘’에 의해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이것은 누구의 몫이다”를 지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경제에 '정치의 그물’을 씌우는 것이다. 경쟁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소비자’ 이익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과 같다.

포퓰리즘은 '원칙에 의한 정치’가 아닌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한다. 포퓰리즘은 경제에도 적용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경제 포퓰리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소비자이고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인 것이다.

자유기업원(www.cfe.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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