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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신영호 기자] 단식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행해왔던 문화적 행위다. 주로 종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으로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속세의 쾌락을 떨쳐내기 위해 단식을 했다. 예수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에서도 부활절 전 40일간 경건하게 지내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맞춰 금식을 한다. 예수가 겪은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고대 그리스 학자 피타고라스는 "단식은 정신 능력을 높여준다"며 40일 동안 단식을 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10일간 단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단식 문화가 세속으로 전해지고 확산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나라를 잃은 것을 자책해 목숨을 끊고자 단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임금에게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밥 먹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진정성이 의심 받으면 단식으로 증명하려는 사례도 여럿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단식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식이 정치적 목적을 띠게 된 것이다. 이때의 단식은 박수도 받고 지지도 얻었다. 서슬 퍼런 절대권력에 맞선 사회적 약자들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한 정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가치가 녹아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단식은 개인 혹은 특정부분의 이익을 얻기 위한 '떼쓰기'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진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숨죽여 지내야 했던 그때 그시절은 지나갔다. 그들에겐 만족스럽진 않아도 부당함과 문제의식을 알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다.

국회는 왜 있고 언론은 무엇을 하는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고통을 널리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곳이 아니던가. 이런 제도적 장치들을 놔두고 극단적인 단식투쟁을 하니 냉소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는 ‘단식투쟁을 잘하는 법’을 묻는 청소년들의 글이 제법 있다. 단식투쟁의 역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진보신당 노회찬 심상정 상임고문이 13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희망의 버스' 참가자에 대한 경찰의 강경진압을 규탄하고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라 한다.

정치인들은 단식할 권리가 없다. 이들은 개인이기에 앞서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공인이다. 국민들이 느끼는 부당함을 널리 알려 공론의 장을 만들어 논의하고 정책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을 하라고 유권자들이 표를 주는 것이다. 단식 잘한다고 표를 주는 유권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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