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함 속 숨겨진 다면적 매력 ... “영화와는 다른 ‘중전’ 그려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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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김범태 기자] 그의 실물을 처음 본 건 지난 2월, 서울 씨네코아에서 열린 연습실 공개 현장에서였다. 한눈에 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첫인상이 단아했다. 그 이미지가 마치 80년대 MBC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 편에 출연했던 탤런트 박순애를 보는 듯 했다.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중전’ 역을 맡은 배우 임화영 이야기다.

이 작품은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광해’를 대신해 왕 노릇을 하게 된 천민 ‘하선’이 임금의 대역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개봉 38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다.

이미 영화로 크게 성공한 콘텐츠인데다, 원작 배우가 워낙 쟁쟁하고 막강한 한효주였던 터라 배역을 맡고도 개인적으로 부담이 꽤 컸을 것 같았다. 영화 이야기로 ‘중전마마’와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Q. 아무래도 관객입장에서는 무대 위의 ‘중전’을 보며 스크린에서 먼저 만났던 ‘중전’을 오버랩 시켰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중전’ 역이 꽤 부담이 되었겠단 생각이 드는데, 어떠세요?

“그렇죠. 부담이 정말 컸어요. 솔직히 오디션에서 제가 뽑힐 거란 생각은 안했어요. 경험 쌓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죠. 마음을 비워서 그랬는지, 운이 좋았는지, 예쁘게 봐 주셨는지 결과가 좋았어요. 연습 과정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가져온 마음은 영화와는 다른 ‘중전’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부담을 최소화하고, 제가 그려낼 수 있는, 연극과 무대만이 살려낼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하자는 게 제일 큰 목표였어요. 지금도 같은 마음이고요”

하지만, 임화영은 한효주의 연기를 그대로 ‘카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원작이 갖고 있는 ‘중전’의 색깔은 고고하게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숨은 매력과 장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중전’이 지니고 있는 아픔과 연민, 상처와 회복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탁월했다.

작품에서 ‘중전’은 한마디로 ‘얼음공주’다. 한때는 자신을 위해 시를 써주며 영원한 행복을 약속했던 성군과 함께 아름다운 날을 살았지만, 점점 폭군으로 변해가는 남편과 왕위를 둘러싼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가족이 몰살당하는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인물이다.

Q. ‘중전’이라는 역할이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동화적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악화되는 주변상황으로 인해 차갑게 변해가는 다면적 심리를 지닌 인물인데,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장면으로 말씀드리자면 ‘하선’이 왕의 대리 역을 맡고 있는지도 모른 채, ‘광해’에게 오빠를 살려주지 않으면 은장도로 자결하겠다고 읍소하는 신이 있어요.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오빠를 살리려는 ‘중전’의 마음이 읽히는 장면이죠. 이 부분에서 ‘중전’이지만 연약한 여자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고, 가슴엔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중전’의 아픔을 표현하려 애썼어요”

그러고 보니 그의 차분하고 단아한 외모와 상반되게 ‘중전’은 첫 장면부터 목소리에 무거운 힘이 들어가 있다. 뭐랄까. 한이 서려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중전’의 감정은 드러날 듯, 말 듯하다. 왕이 된 ‘하선’이 “중전은 왜 웃질 않소? 한 번 웃어보시오”라는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Q. 영화에서 이 부분은 클로즈업으로 처리되잖아요? 하지만, 무대에서 ‘중전’의 세밀한 표정을 관객들에게 오롯이 보여주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텐데, 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냈나요?

“사실 처음에 걱정이 많았어요. 저희 작품이 무대도 크잖아요? 거기다 섬세한 감정연기인데, 저희의 표정이 관객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죠. 하지만 그때까지 전개된 스토리가 있고, ‘중전’이 가진 이미지가 관객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표정을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보여드릴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선 ‘중전’의 미소(표정)를 관객의 상상에 맡긴 측면도 있죠”

Q. 혹시, 이 장면에서 연출이 특별하게 요구한 연기패턴이 있나요?

“‘광해’와의 심리전을 강조하셨어요. 비록 ‘광해(하선)’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 오빠를 풀어주지만,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말라는 주문이었죠. ‘광해’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이 일 하나로 모든 문제가 풀린 게 아니라는 거죠. 한마디로 ‘광해’와 밀당을 계속하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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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원작인 영화와 결말이 다르다. 독살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광해’가 자신의 대리 역이 있었다는 사실에 ‘허균’과 ‘조 내관’ 등 측근을 모두 제거한다. ‘하선’ 역시 3년을 도망 다니다 자객에 의해 결국 살해된다. ‘하선’이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토록 사모하던 ‘중전’의 무릎에서 눈을 감는다. 그곳은 천상이다. 임화영 역시 이 장면을 최고로 꼽았다.

Q. 아무래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결말이라 뇌리에 더 깊이 남는 것 같아요. 대사는 없지만 오히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는데, 이 장면 연기할 때 어떠셨어요?

“말씀하신대로 대사도 없고 분량도 짧지만, 잘 표현하려고 애썼어요. ‘하선’이 그토록 바라던 장면이기도 하잖아요? 영원히 잠드는 ‘하선’을 안고 이제 편히 쉬라고 토닥이는 판타지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도 하고요. 죽어가는 ‘하선’을 보면서 관객들이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는 인터뷰 도중 ‘중전’과 자신의 성격이 정반대라 감정을 누르고 연기하는 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연습실 공개에서 기자들과 만난 배우 김도현은 ‘현장 분위기 메이커가 누구냐’는 질문에 “임화영은 단아함 속에 이중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 짓게 했다. 그의 실제 성격은 어떨까.

Q. 본인 역시 “성격적으로 ‘중전’이 나와는 다른 캐릭터라 쉽지는 않다”고 얘기한 적 있는데, 역할에 집중하는데 어렵지 않았나요?

“평소 무척 활달하고 소탈한 성격이에요. 작품에 출연하는 여배우가 ‘사월이’ 김진아 씨와 저 딱 두 명인데, 요즘은 오빠들이 남동생 같다고 말할 정도로 털털해요. 이런 성격 때문에 캐릭터 잡는데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솔직히 저는 저, 중전은 중전이죠. 연출이나 선배배우들과 이 역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캐릭터를 분석하고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는데 어렵지는 않았어요”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개막 이후 인터파크 등 주요 예매사이트에서 랭킹 1, 2위를 꾸준히 유지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임화영은 그 비결로 뛰어난 작품과 함께 탄탄한 팀워크를 꼽았다. 동료배우는 물론, 연출팀과 스태프에게 공을 돌리는 그의 모습이 환한 미소만큼이나 예뻤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배울 게 많은데 알게 모르게 많이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연이 끝나더라도 이 인연과 고마운 마음은 오래 갈 것 같아요”

자리를 일어서며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저희 작품을 사랑해주시는 관객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대학로에 나들이 나오셔서 ‘어떤 공연 볼까’ 고민되시면 주저마시고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선택해주세요. 특히 저희 작품은 포스터만 봐도 보고 싶어지잖아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망설이지 말고 보러 오세요~”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오는 21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한다. ‘중전’ 임화영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진: 선호준(스튜디오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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