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선의 리듬‥자아 그 서정의 깊은 관조


▲작품=시월의 기억을 위하여, 69.5×115㎝ 한지에 수묵담채, 2001

[투데이코리아=권병준 문화칼럼리스트] 오후의 햇살은 연가처럼 부드러웠다. 진홍 립스틱처럼 열망에 물든 꽃잎을 맴도는 고추잠자리. 그립던 한 줄의 편지를 읽어가듯 강둑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키 큰 코스모스 행렬이 춤을 추듯 시월의 추억이 담긴 그립던 한 줄의 편지를 또박또박 써내려간 흔적. 아마도 성찰의 진한 고독이 묻은 문장이었으리.

외경(畏敬)의 세상은 ‘나’를 마른 언덕위에 홀로 세워두고 추야장(秋夜長)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코스모스가 비스듬히 때론 허리가 휠 정도로 스러졌다 꼿꼿이 허공을 향해 도약하듯 일제히 꽃잎들이 한 방향으로 흔들릴 때 우렁찬 군무(群舞)의 가쁜 호흡들이 생(生)의 무게를 대지에 내려놓았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이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김사인 詩, 코스모스>


▲사진=作家 김충식


餘白에 내려앉는 열림의 근원

나목(裸木)의 미루나무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겨울아침. 자욱한 겨울안개가 비포장 길 위에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차갑다 못해 차라리 시린 한줄기 바람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갈 즈음 안개 속에 언뜻언뜻 아직도 잊지 못한 그리움처럼 눈발이 날렸다.

뜻밖에 설경(雪景)을 만난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친구의 이름으로 대신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이내 사라졌다. 눈 속 깊은 곳에 담아둔 행복한 꿈의 여백처럼 두 손으로 감싼 따끈한 감잎 차(茶) 온기가 입안을 녹인다. 이윽고 수묵(水墨)과 담채(淡彩) 화면위에 눈이 내린다. 그리움이 티끌하나 상처 없이 몸을 숨긴다. 어머니 품 그 다음으로 포근한 눈 속. 함박눈 내린다. 비로써 열리는 마음의 여백(餘白)에 내려앉는 저 질서의 근원!


▲작품=가을바람을 보내며, 136×170㎝, 2003

바다의 노래 線의 자애

포구의 배들이 파고에 한번 씩 흔들릴 때마다 마음의 화(禍)가 쩍쩍 얼음이 갈라지듯 금이 갔다. 누군가 환청처럼 말을 걸어왔다. 배는 흔들리며 앞으로 가는 거라고, 엉킨 덩어리들이 통곡의 풍랑에 한순간 사라지는 그때 비로써 창백한 민얼굴로 귀항(歸港)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렇게 메모했다. “바다! 휴식하는 배들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준비하고 억겁시간을 기꺼이 아낌없이 건네준다.

화면의 배를 포근히 감싼 선(線)의 자애, 나의 노래여.”
수직과 사선의 변화를 소화한 평화롭고 안정감 주는 대지의 넓은 가슴 지평선. 다른 선들에 의해 변화를 맞이하고 포용하는 수평. 화면에 담아 낸 앞자락과 뒷자락 대비를 통한 공간의 연속성과 조화의 흐름. 작가는 “안정과 넉넉함을 해치지 않으면서 무료함과 지루함을 덜어주는 구불구불한 논둑길이나 열심히 성장시킨 나무둥치들의 선들은 적막을 깨지는 않지만 지루함을 덜어주며 변화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정경(情景)을 보여 준다”고 했다.


▲작품=섣달의 외출, 48×48㎝, 2006

자연 속 평론한 그림

그는 이십여 년 전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시 고척면 방도리 시골마을로 옮겼다. “자연과 좀 더 가까이서 생각하며 작업하고 싶어서 이주했다. 대자연 속에서 깨닫게 된 사실은 자연의 모습은 같은 장소에서도 매번 다르며 또 전혀 다른 모습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기막힌 소재와 기발한 생각보다는 그림을 즐기며 사색하는 가운데 사물의 아름다움이 여러 이치(理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전했다.


▲작품=십이월 스무사흘 날에 포구의 표정, 142×363㎝, 1998

한국화가 김충식 작가는 홍익대 교육대학원과 단국대 조형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1989년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잠실롯데미술관, 동호갤러리 등을 비롯해 파리, 동경, 상해, 마닐라 등지에서 개인전 38회와 그룹 및 초대전 400여회에 출품했다.

그는 작가로서의 세계관을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스케치여행에서 자연의 시간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었다. 그때 자연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꾸밈없는 노력만이 좋은 작품을 그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의 그림에서 평안함과 부드러움을 찾을 수 있고 그 감동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발견해 내는 능력이 키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