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두 달의 속도와 방향을 수정해보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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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옷을 벗는 달이다. 전국의 골짜기와 고을들을 노랗고 빨갛게 물들인 단풍들이 낙엽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달이다. 10월의 화려함과 풍성함은 이미 잊혀진 계절과 어느 멋진 날이 되어 이내 우리의 기억 속에 박제된다. 자연만이 그렇던가.

우리 삶도 옷을 벗는다. 부끄러운 속살과 민낯을 드러내어야 한다.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결국은 초라한 성과 앞에 얼굴을 붉혀야 한다. 그래서 11월은 그동안의 길을 돌아보고 남은 두 달의 속도와 방향을 수정해보는 달이다.

봉급쟁이의 11월은 을씨년스럽다. 누구는 승진하고, 누구는 탈락을 하고, 누구는 자리를 옮겨야한다. ‘임시직원’이라는 임원들은 그저 좌불안석이다. 요즘도 어떤 기업들은 모든 임원들의 사직서를 받아 재신임절차에 들어간다. 정년이 연장되었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특히 올해는 제조업 뿐 아니라 잘나간다던 은행과 증권쪽 사람들이 더 불안해하고 있다.

11월을 긴장과 초조함으로 맞는 사람도 있다. 대입준비생들이다. 오는 13일은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올 가을들어 처음으로 서울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예보되어 올해도 역시 입시한파가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몸과 맘을 떨게 할 전망이다. 수시보다 정시비율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수능성적이 당락을 좌우한다.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는 입시자녀를 둔 부모들의 기도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기도를 듣는 신(神)들도 매년 11월에 함께 수능을 치르고 있다.

11월은 겨울을 준비하는 달이다. 봄날의 황사와 여름철의 소낙비로 얼룩이 진 베란다 유리창에 닦아낸다. 화분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어릴 적 이 맘 때쯤 부모님들은 안방 건너방 사랑방 할 것 없이 문짝들을 다 떼 내어 양지바른 곳에 비스듬히 세워두고 새 문종이를 발랐다. 밀가루로 쑨 풀과 문종이가 야릇한 냄새를 풍겼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빗자루로 문지르고 쓸어가면서 문종이를 바르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이나 들여다보곤 했었다.

11월은 첫 눈이 오는 달이다. 첫 눈이 오면 아련하게 생각나는 짜릿한 추억들을 하나이상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첫 눈은 먼데서 온 귀한 손님처럼 모든 사람들이 반긴다. 화촉을 밝히는 신방을 문구멍을 통해 서로 밀치며 들여다보듯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첫 눈을 맞는다. 휴대폰들이 난리다. 평소 서먹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첫 눈 소식과 함께 안부를 전하면 예기치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다. 대학가 카페와 주점들은 다양한 첫 눈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1월은 송년의 달이다. 송년회, 망년회의 풍습과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그중에서 모임의 시기가 11월로 당겨졌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가족 친지간의 행사, 직장의 공식적인 모임이 많은 12월에 대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인기 있는 건배사들이 온라인을 달구기도 한다.

골퍼들의 11월은 아쉬운 달이다. 올해 라운딩을 마쳐야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골프장들이 겨울철에도 개장을 하지만 베테랑 골퍼들은 스윙이 망가진다고 겨울철 3개월은 다른 운동으로 체력을 가꾼다고 한다. 그들에게 11월은 납회의 달이다. 원래 ‘납회(納會)’라는 말은 증권거래소에서 실시하는, 매달 최종 입회일을 말하지만 ‘그해 마지막 모임’이라는 뜻으로 주로 골퍼들에게 자주 쓰인다. 라운딩 중에는 설거지(그린 근처에서의 플레이)가 중요하듯 납회를 잘해야 한해가 잘 정리하고 내년 라운딩도 건강하게 잘 맞을 수 있다고 한다.

11월은 또 미당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가 생각나는 달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봄날의 소쩍새 울음소리도, 여름날 천둥소리도, 간밤의 무서리도 마다않고 모든 것을 품고 피어난 노오란 국화꽃. 미당은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이 생겼다며 여인의 원숙함으로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11월은 조용히 회색빛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년의 성숙함이 묻어있는 느낌이다.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한 해에 한 번씩 가을 곡식을 거둔 뒤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올린다. 1620년에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 해 가을에 처음으로 거둔 수확으로 감사제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미국에서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정하고 대부분의 학교와 직장에서는 다음날인 금요일을 휴무로 하여 총 4일간 쉰다. 추수감사절은 쇼핑시즌으로도 유명한데 검은 금요일이라고 불리는 금요일에는 모든 상점들이 세일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하러 다닌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11월도 똑같은 속도로 우리 곁을 훌쩍 지나갈 것이다. 몇 겹 남지 않는 두루마리 화장지가 처음 두툼한 화장지보다 빨리 돌아가듯 괜히 맘이 조급해지기 쉬운 달이다. 축구에서는 처음과 마지막 5분이 중요하고, 야구에서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얘기가 있다. 시작이 중요하듯 마무리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제는 잔치를 끝내고 이제는 각자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이다. 엄숙하기까지 한 이 같은 자연의 섭리를 지켜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미리미리 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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