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국내에서는 전설로만 회자되었던 군사관련 서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그것도 일본 해군 조종사의 관점에서 씌여졌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알려진 바로는, 이 책을 번역, 출간하려는 시도가 몇 년전부터 있었으나 반일 정서로 인한 '역풍'을 우려한 출판시장의 자체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던 것.그러나 원작이 일본과 미국에서 출간된지 50년만에 한 군사애호가의 노력으로 국내에서도 모습을 나타내게 됐다.

이 책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해군 전투기를 몰았던 전직 제국해군 조종사가 과거의 전투를 회상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주인공은 가난한 사무라이의 후손, 비행을 일삼다가 해군 수병으로 입대해 훈련생으로 비행기 조종간을 잡게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후 하사관을 거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중위까지 올랐다. 해군에 입문한지 10여년만의 성과다.

여기까지만 보면 입지전적 파일럿의 무용담으로 여겨지기 쉽다. 특히나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이 잔인한 행동을 많이 보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일제 치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전직 일본군 파일럿의 영웅담류에는 읽기 전부터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옮긴이와 감수자의 신신당부(서문)와도 같이, 이 책은 대책없는 구 일본군 찬양이나 일제 만행의 포장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무라이의 후손으로 정신교육을 받으며 자란 한 젊은이가 사회적 지위로나 내면적으로나 성장하는 과정과 그 감종기복, 특히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잔인한 사무라이의 외피가 아니라, 진정한 무도가 어떤 것인지, 참혹한 세계대전 앞에서 일개 파일럿이 얼마나 나약할 수 있는지,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후방에 남겨둔 젊은이가 어떤 심리상태를 겪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씨줄과 날줄로 엮어 오히려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적기를 부지런히 격추해 나가는 데 희열을 느끼던 파일럿이 점차 조용하고 깊이 있는 무사로 거듭나는 과정과, '항상 죽음을 준비하고 산다'는 맹목적 가르침에서 “과연 내가 이 전쟁에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철학적 성장을 담고 있다.

처음에 지은이에게 제로센 전투기는 격추왕(에이스)으로 성장할 출세의 도구였으나, 날이 갈수록 어떤 게 진정한 무사도인지 고민하는 키워드가 된다. 피격당해 쩔쩔매는 적군 조종사에게 숨을 돌릴 기회를 주는가 하면, 장교와 사병간에 불합리한 처우를 당연시하는 '해군 내 카스트' 제도에 대항하는 조종사로 그는 성장해 나간다. 사무라의 정신의 왜곡된 전형인 '가미카제 돌격'에 처음에는 그 필요성을 수긍하지만, 막상 부하들과 가미카제 돌격 명령을 받자 고민 끝에 부하들을 살려 되돌아오는 결단을 내리는 등 그는 자신의 내면과 비행기에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마지막에는 '다시 전쟁이 터지고 조국이 부르면 조종간을 잡겠지만, 그런 날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독백으로 책을 맺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책.

급한 출판 탓인지 가끔 오자나 탈자가 눈에 띄고, 부록인 구 일본해군 항공대의 계급체계표에서 영관급과 위관급 장교표에 오류가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각국 비행기 제원표 등 부록이 충실한 편.

사카이 사부로 지음/가람기획 펴냄/07년 12월 14일 출간/515페이지/정가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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