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새해가 지나자 매일같이 날씨가 춥다. 서울에서 다시 영천으로 내려가기 전에 우리 부부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이에 대해 말하자면 20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남편이 한국에서 오랫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일을 모색하느라 중국 연변 지역으로 가 그 쪽 한인들과 술자리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남편은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건강을 많이 상해 금주한지 10년이 다 되었을 때였다. 하얼빈에서 오신 좌중의 한 분이 영천 말씨인 듯 해서 남편이 그분에게 고향을 물어봤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다 비슷하게 들리지만 같은 경상도 사람끼리는 동네마다 다른 민감한 차이를 금방 안다는 것이다. 즉 영천 말 다르고 경주 말 다르고 구미, 안동 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같은 영천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 분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고 한다. 1살 애기 때, 부모 손에 이끌려 영천을 떠난 실향민이 처음으로 영천 사람을 만난 순간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채로 그 분이-나그네 서름-을 애끓게 불렀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어떻게 고향 형님을 만났는데 술 한 잔 안 먹을 수 있느냐? 네가 이 빼주 한 잔을 먹지 않으면 고향 아우로 생각지 않겠다는 눈물겨운 협박(?)에 남편이 큰 컵에 가득 담긴 56도 빼주 한 잔을 끝까지 비우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본인도 너무나 오랜만에 술을 먹는지라 솔직히 겁났다고 하는데, 남편 왈, 쭈욱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술기운이 너무나 황홀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남편을 다시 주(酒)의 세계로 들게 한 그 영천 양반을 나는 오랫동안 미워했었는데 오늘 그 최 성환 교수 내외를 다시 만나러 가게 된 것이다. 남편은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분을 못 잊고 사업적이거나 인간적이거나 간에 여러 모로 도우려 애썼다. 나도 덕분에 흑룡강 성 하얼빈까지 가서 두 내외분과 함께 얼음 축제를 즐긴 적도 있다.

영등포구 신길 지하철역 1번 출구에서 만나 그 분이 우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찾아놓은 중국 조선족 식 요리 집까지 걸어갔다. 지나가면서 보니 이곳저곳에서 중국말이 들려온다. 간판도 한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안 쓰는 한문으로 뭔가 다르다. 이곳이 말하자면 서울 안에 있는 중국 타운인가 싶었다. 음식점 간판의 제목은 동북풍미(東北風味)이다. 벌써 이름부터 진짜 중국식이 아닌가? 요리를 시키려 책자를 보니 잉어요리가 전면에 나온다. 값은 시가. 물어보니 3만 5천원이란다. 중국에 몇 번 갔을 때 최고급 요리점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요리가 잉어요리라고 했는데? 역시 남편은 그걸 시켰다. 잉어? 이 겨울에 얼음을 뚫고 잡은 건가? 주문 후에 나온 비주얼은 북경서 만난 그 모습은 아니었지만 맛은 좋았다.

여러 가지 요리를 먹고 남은 음식은 몇 번 사양 끝에 싸 가시기로 하고 용돈도 드렸다. 교수님 집으로 가는 길을 함께 하면서 사모님은 내게 하나 있는 아들이 3년 전 이 곳 한국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는 것을 담담하게 얘기하신다. 지금은 딸네 집에서 사신단다. 정작 그 말을 들은 내가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일제강점기, 너무나 힘들어 한국을 떠난, 또는 광복을 바라고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만주로 갔던 분들, 그 분들의 자녀가 여기 노인이 되어 돌아와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우리가 지금 영천에 조그만 집을 짓고 귀향했으니 날이 따뜻해지면 꼭 내려오시라고 말한다. 최 교수 내외도 부모님께 전해 들었던 그 고향집을 찾아갔던 얘기를 우리에게 해 준다. 이야기와 꼭 같았다고. 지금은 남이 살고 있는 고향집을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노라고 얘기해 준다. 너의 고향이기도 하고 또 나의 고향이기도 한 영천이다. 마음속에 언제나 고향을 품고 있을 모든 도시민들을 위해서도 나부터 그 곳을 예쁘게 다듬고 싶다.

그리운 고향, 내 마음 속의 고향, 영천을 위하여! 건배!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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