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서양철학의 ‘중시조’쯤 될까요,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업적을 가리켜 ‘철학적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했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천문학과 물리학의 근본을 뒤집어놓은 코페르니쿠스에 비견했던 것이지요. 칸트 이전의 서양철학은 대부분 ‘존재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주’와 ‘사람’,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과 속성을 밝히는 것이 철학적 사고의 궁극적 대상이었지요. 그리고 인간의 ‘인식’에 대해서는 ‘자아(自我)가 빠진 채 수동적 감각만 인정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칸트는 이것을 뒤집어 ‘존재론’의 범주를 포괄하되 이를 넘어서 자아의 선험적 형식과 경험적 질료에 입각한 ‘주체적 인식론’을 전개한 서양 최초의 철학자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칸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의 비판철학 시리즈는 서양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저작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과 그에 기초한 도덕률은 후대의 서양철학뿐 아니라 전 인류의 사고와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의 인식론의 기본개념들인 ‘물자체(物自體, Ding­an­sich)’나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 등을 살펴보면 ‘반야심경’의 기본개념인 ‘오온(五蘊)’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순수이성비판이 1781년에 출판되었고 판단력비판이 1790년에 간행되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30년 전의 일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약 2천 5백 년 전의 경전이니까 엄청난 시간적 거리가 있는 셈인데 정교한 인식론의 논리체계가 그렇게나 흡사하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반야심경은 당나라 현장(玄奘)법사가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 통용되어왔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짧은 경속에 거의 대부분 축약해 놓았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 첫머리가 이렇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이 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밝혀보시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건너셨느니라.” 즉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것인데 이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원시불교의 인식론의 기본적 논리체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색(色)’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칭한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칸트의 ‘물자체’와 통하는 개념인 셈이지요. ‘수(受)’는 감각 센서를 통해 ‘나(自我)’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최초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눈(眼)으로 물체(色)를 보고, 귀(耳)로 소리(聲)를 듣고, 코(鼻)로 냄새(香)를 맡고, 혀(舌)로 맛(味)을 보고, 몸(身)으로 닿아서(觸) 느끼는 ‘5감’이 그것입니다. 칸트의 ‘감성(感性)’이 거의 같은 개념이지요. 혹자는 ‘뜻(意)으로 이치(法)를 안다’는 부분을 감성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상(想)’은 감각 센서가 받아들인 것을 형상화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아 이것이 ‘무엇’이구나”하는 단계인 것이지요. ‘행(行)’은 그 다음 인식의 단계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지”하는 단계라고 할까요. 저는 칸트의 ‘오성(悟性)’이 두 단계에 걸쳐있는 개념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지막 단계가 ‘식(識)’인데 칸트의 ‘선험적 형식과 경험적 질료에 기초한 이성(理性)’이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불교는 ‘의(意)’와 ‘법(法)’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하지요.

칸트는 그의 인식론을 기초로 “네가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나 적용되게 하라”는 ‘정언명법’을 도출하였고, 부처님은 불교 인식론의 기본인 오온을 “수련을 통하여 그것이 모두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식론의 논리체계는 흡사한데 도출된 결론은 또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 정진해야 되겠습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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