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지난 주 일주일 동안 필리핀을 다녀왔다. 남편과 나는 동갑이지만 내가 정월 생이라 먼저 칠순을 맞게 되었다. 게다가 내 생일 이틀 후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결혼한 지 46년 동안 우리의 결혼기념일 날은 언제나 추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세 자녀들이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가기를 권한 데다 관절염에도 더운 곳이 좋다기에 필리핀을 택했다.

필리핀의 세부는 우리 부부가 15년 전 처음 골프를 접한 곳이다. 남편의 대학교 후배가 세부에 있던 일본인 소유 골프장을 인수하고 난 후 우리가 첫 회원권을 사 주면서 골프에 입문했던 것이다. 세부 막탄 공항에 내려서 마중 나온 직원을 만나고 세 시간 버스길을 달려 골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 헤아려보니 지난번 방문 때부터 거의 5년이 흘러가서 모든 게 낯설 줄 알았는데 한국인 직원 뿐 아니라 필리핀인 캐디나 직원까지 아는 얼굴이 많아서 도리어 내가 놀랐다. 모두들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이 세부 인터내셔널 골프 리조트는 세부 공항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지만 바로 바다에 면해 있어 언제든지 해수욕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골프장은 한국의 골프장처럼 고급스럽다거나 엄격하지 않다. 한국에서 골프를 칠 경우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캐디의 지시(?)대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곳 세부에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출발해 개인 캐디의 시중(?)을 받으며 잘 못 치면 또 쳐 가며 실력을 연마할 수 있다. 골프가 끝난 후엔 부드러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하며 저녁에는 전문 마사지사가 피로를 풀어준다. 한국 골프장의 5분의 1 가격으로 골프를 치면서도 불만이 많았던 지난 날 생각에 부끄러워지며 아직도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한국과 필리핀의 경제력 차이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곳에서 내가 사치를 누렸던 것은 숙소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들을 읽을 때였다. 틱 낫 한 스님의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의 침묵-이라는 책이 먼저 눈에 띄었다. 스님은 걱정과 불안을 없애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방법으로 긴 호흡을 주장하였다. 한번 길게 들이쉬면서 미소 짓고 한번 길게 내 쉬면서 근심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두 번째 책은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이다. 이 책도 내게 삶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주위에 널려 있는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였는데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영위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건이란 일주일이면 익숙해지고 일 년 후엔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인생 황혼기에 있는 지금, 주위의 구름들이 사라져야 아름다운 낙조를 보게 되듯이 미리미리 주변을 정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다음은 다이빙에 관한 잡지 -해저여행-이었다. 필리핀의 아름다운 산호를 볼 수 있는 다이빙 포인트를 정리한 기사 중에서 이 곳 세부의 다이빙 포인트로 여행 온 일본인 할머니 두 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터넷의 시니어 다이빙 클럽에서 만나 이곳까지 다이빙을 하러 온 65세의 할머니들, 늦게까지 취미생활을 가꾸어 삶을 풍부하게 영위하는 그들의 기사를 읽으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입춘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에어콘을 틀었던 영상 30도에서 꽁꽁 싸매도 추운 영하 10도까지의 환경에 적응하는 인체가 대단하다. 그래도 서울보다는 영천이 훨씬 따뜻하다. 남편과 나는 이곳에 내려올 때 과수원을 조성하려고 했었다. 그 중간에 세 홀 정도의 귀여운 미니 골프장을 만들면 어떨까? 아이들까지도 일찍부터 골프를 배울 수 있게 동물 모양의 조형물이 들어간 깜찍한 골프장 말이다. 여행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여행과 영감에 찬사를!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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