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3월 8일은 1950년에 우장춘 박사의 귀국환영회가 있었던 날입니다. 그때 우 박사가 했던 짧은 답사를 인용합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는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뼈를 조국에 묻을 것입니다”

1945년 8·15 이후 스무 날도 채 안된 9월 3일, 우 박사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명백히 밝히면서 당시 일본 최고의 종묘회사였던 ‘다키이(瀧井)’의 연구농장장 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당국의 출국 불허 방침에 불복, 서울에 있던 자신의 호적을 확인하고 오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가 제 38회 귀국동포 송환선을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분은 ‘우장춘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생활비로 송금한 100만 엔을 쓰지 않고 육종 관련 서적과 실험용 기구, 각종 종자를 구입하여 귀국 시 가져왔다고 합니다.

우 박사는 한 마디로 ‘불모지였던 대한민국 원예의 개척자’였습니다. 무, 배추의 우량종자를 생산 보급한 일을 비롯하여 종자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종자 생산체계를 확립한 일, 초대 원예시험장장으로서 시험연구시설·장비와 기자재의 확보, 시험연구와 지도체제 정비 및 인력 양성에 전력을 다한 일이 그분의 주된 업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우 박사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959년 8월 7일에 안익태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그분은 “이제는 여한이 없다. 나의 조국이 나를 알아주었다”라고 병상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 박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세계적인 육종학자로서 ‘닥터 우의 꽃’으로 알려진 페투니아 겹꽃을 만들었고, 세계최초로 ‘종의 합성’이라는 육종학의 신기원을 이룬 분입니다. 그러나 우 박사의 어머니가 자식을 일본인으로 기르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조센징’이라는 멸시와 차별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밟혀도 꽃피우는 길가의 민들레꽃’으로 키웠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 박사는 일찍부터 ‘밟혀도 꽃피우기’ 위해서는 ‘길가의 민들레꽃’처럼 모멸과 질시를 참고 기다리는 지혜뿐만 아니라 자기완성의 신념과 용기, 자기방어의 능력과 기술, 즉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의 뼈저린 가르침을 바탕으로 스스로 체득하였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화려한 보석이지만 인공으로는 가짜밖에 만들 수 없다. 진주는 인공양식이 가능하므로 누구나 노력하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학문적 성과는 다이아몬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알 한 알의 진주가 모여서 덩어리로 찬란한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명한 우 박사의 ‘진주 이론’입니다. “젊은 사람이 노력은 않고 남이 거둔 성과를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부러워 갖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능력껏 노력해서 자신의 진주를 하나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누구나 20대는 예리하게 각이 져 있는 삼각형과 같다. 두리뭉실, 원만하기만 해서는 20대가 아니다. 그러나 패기만 있고 올바른 판단이 없으면 만용이 되어 남을 상하게 하고 자기도 상하게 된다” 우 박사의 ‘삼각형의 정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삼각형 안에 차츰 원숙한 인생관과 올바른 판단력이 더해지면서 30대부터 모서리가 잘려 6각형, 40대는 12각형, 50대는 24각형, 60대든 48각형으로 거의 원에 가까워지게 된다”라고 이어집니다. 그분은 “만약 인생 수련을 게을리 하면 원이 제대로 차지 못해서 우글쭈글 아무 짝에도 못쓰게 되고, 60대가 되어도 아직 삼각형인 채로 있는 사람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내공이 쌓인 분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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