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부부만 조용히 생활하다가 딸네 식구가 합류하니 생활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줄곧 마음이 흐뭇하다. 이곳 시골 생활을 마다 않고 찾아와 준 딸이 기특하다. 딸은 미국에 있었어도 아파트가 아닌 단독 주택으로 대지가 넓어 텃밭도 가꾸어 본 적이 있고 잔디에 풀 뽑느라 애 쓴 적도 있다 하니 농사일엔 나보다 선배인 것 같다. 우리 집 앞에 예쁘게 장만해 놓은 텃밭에서 호박과 오이를 따고 상추와 쑥갓을 뜯으면서 많이 부러워한다. 자기 집 넓은 땅에 처음 멋모르고 채소를 가꾸었더니 수확 철이 되기도 전에 사슴, 토끼, 두더지 등 동물들이 내려와 다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달걀을 얻으려고 치던 닭들이 코요테와 래쿤한테 학살을 당한 후에는 농사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한다. 동물? 여기서는 개와 고양이가 고작인데, 역시 광대한 땅을 가진 미국은 스케일이 다른 모양이다.

어젯밤엔 돌풍을 몰고 세찬 비가 내렸다. 아침에 나가보니 옥수숫대가 대부분 비스듬히 누워있어 일으켜 세우느라고 애썼다. 서풍이 불었는지 동쪽으로 모두 기울었다. 고랑의 흙을 한주먹 손에 쥐고 둥글게 사발 엎은 것처럼 뿌리 부분에 꼭꼭 눌러 옥수수를 똑바로 세웠다. 우리 텃밭의 흙은 찰진 진흙이라 둥근 모습으로 만들기는 쉽다. 마치 도자기 그릇 빚는 기분이다. 도자기 전시회에 참가했었던 딸 말로는 농사짓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가마터 흙으로는 아주 비싼 질 좋은 찰흙이란다.
한차례 비가 지나가니 식물들이 모두 청신해 보인다. 딸이 말하길 이럴 때는 잡초를 뽑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겠다. 둘이 다 장화를 신고 밭고랑에 들어가 잡초를 뽑으니 호미를 들 필요도 없이 쑥쑥 잘 빠진다. 텃밭을 돌보며 지난번 꽃씨 심은 곳을 살피니 잡초만 많이 눈에 띈다. 잡초뿐 아니라 지난해에 심은 메밀과 시금치도 이곳저곳 자라고 있다. 원, 참. 언제 꽃씨 싹트는 것을 보게 될까나? 역시 땅이 안 맞아서 꽃밭 만들기가 어려운 것 같다. 모래를 한차 사오든가 퇴비를 몇 포대 부어야 할 것 같다.

별빛 중학교에서 기숙중인 외손녀들에게 카톡 소식을 들으며 일희일비 하는 것이 요즘 우리 식구들의 중요 일과다. 그것도 밤 10시가 되어서 기숙사 방에 들어온 손녀들이 번갈아 제 엄마한테 소식을 알려온다. 아침 7시에 점호해서 밤 10시에 다시 점호를 받으니 아이들이 –밀리터리 캠프-라 부르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고........불평하던 아이들에게 –그럼 이제 학교 그만 두고 집에 와. 엄마가 데리러 갈까?- 하면 서로들 –노우-다.

이때부터는 자랑이 시작된다. 스페인에 대한 강연을 하던 외부강사가 여기 스페인어 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할 때 자랑스럽게 손들어서 몇 마디 했다거나 (미국에선 스페인어가 제2외국어이다) 어제는 일본어 반엘 가서 일본말을 했다고 막내가 자랑을 한다. 내일은 중국어 반엘 가겠다나? 일본만화, 중국만화를 보면서 익힌 몇 마디 말에도 신이 나나 보다. 큰애의 담임 선생님은 한국말 잘 알아듣는다고 칭찬하신다. 사실 제 엄마가 하는 우리말을 듣다 보니 생긴 감(感)이란다. 사실인지 아닌지 할머니인 나도 헷갈릴 때가 있다.

내일은 점심 식사 시간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해 볼 생각이다. 교장선생님이 허락을 해 주셨다. 딸은 그저 밥 먹는 아이들 얼굴만 보아도 좋겠단다. 미국에서도 이렇게 오래 아이들과 헤어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손녀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 기쁘다.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시골서도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그 애들로서는 한국 친구들과도 사귈 기회가 생겨 얼마나 즐거울까? 세계인으로서의 입문인 셈이다.

얘들아! 세계 한 마을에서 세계인으로 어깨를 겨루고 살길 바래! 화이팅!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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