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막론 ‘농민봉기’ 원인은 ‘불통’과 ‘그릇된 정책’

▲ 쌀값인상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선 농민, 시민단체 관계자들.


[투데이코리아=이준호 기자] ‘쌀값’을 두고 온 사회가 갈등을 겪고 있다. 한 야당과 농민들은 지금보다 더 올려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다른 정당들과 소비자들은 낮춰야 한다고 호소 중이다.


쌀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한국인의 주식(主食)이다. 한국인은 대부분의 식사를 밥과 함께 한다.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쌀값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급격한 쌀값 인상은 정부 실책이라는 게 여야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 야당 의원은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올려야 하는 것을 정부 실패로 시장에 불안감을 끼쳤다”고 비판했다. 여당 의원도 정부 수급물량 정책 중 하나인 ‘논 타(他)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부적합함을 지적하면서 “농식품부는 올해 생산조정제의 준비부터 결과까지 전 과정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같은 갈등 속에 쌀 소비량은 급감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을 사상최초로 60kg 아래로 추정했다. 오락가락 정책과 국론분열 속에 고통받는 건 결국 농민들이다.


급기야 농민들은 단체행동에 나서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달 22일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부여당에 대책을 촉구했다. 이들은 “6년 전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일 땐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목표가격 21만7000원을 주장했다”며 “여당이 되니 19만6000원을 말한다. 손바닥 뒤집 듯 농민을 배신하는 여당 행태에 분노한다”고 성토했다.


이들은 “막대사탕 500원, 껌 한 통이 800원인 세상에 밥 한 공기(100g)당 쌀값은 245원”이라며 인상을 거듭 촉구했다. 쌀값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농민들 반발은 그에 비례해 거세지고 종래에는 대규모시위까지 벌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 농민들의 한(恨)이 서린 만리장성의 모습.


지친 농민들, ‘행동’에 나서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농업을 중시했다. 농업국가였던 조선 때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근본이라는 뜻이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럽 등 모든 나라들은 농업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농업이 실패하면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농민봉기는 기원전 209년 중국 진(秦)나라에서 발발한 ‘진승·오광의 난’이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은 본시 밭을 가는 농부였다. 두 사람을 포함한 900여명은 어느날 지금의 베이징(北京) 인근 작업장에 부역을 위해 소집됐다. 이들은 대택향(大澤鄕)이라는 지역을 지날 무렵 큰 비를 만나 예정된 소집시간에 당도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중벌을 받을 위기에 처한 이들은 진승, 오광을 중심으로 봉기를 결심하게 된다.


‘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어진거니 벌 안 받아도 되지 않나’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당시 진나라 법률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법가(法家)를 채택한 진나라 법률은 ‘융통성’이라고는 눈꼽 만치도 없었다. 홍수가 나든, 지진이 나든 정해진 기한은 반드시 지켜야 했으며 어기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이들이 반란을 결심한 데에는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도 존재했다. 진나라는 수백년간 지속된 전국시대(戰國時代) 및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국고손실을 살인적인 세율로 충당하려 했다. 게다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기 위해 농민들을 대량소집했다. 농민들은 일터를 잃은 채 재산마저 대부분 빼앗기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많은 수가 죽어 장성의 일부가 됐다.


지금도 만리장성 중 후대에 증축된 곳을 뺀 나머지 구간에서는 ‘사람 뼈’가 출토돼 그때의 참혹했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만리장성과 얽힌 야사들도 많다.


열녀맹강녀(烈女孟姜女) 설화에는 인부로 끌려간 남편에게 겨울옷을 주기 위해 천리를 걸어 장성에 도착한 여인이 장성의 일부가 된 남편의 시신을 보고 통곡했다는 내용이 있다. 어느 여염집에서 묵은 한 남성이 여주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만리장성의 남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더니 편지에 ‘이 사람이 남편과 교대하기로 한 사람’이라는 글이 적혀 있어 졸지에 노역장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봉기한 진승, 오광은 분노한 농민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세를 불려 전국토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전쟁에는 도가 튼 정부군과의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밀려 결국 난은 진압되고 말지만 이 여파로 초한쟁패(楚漢爭覇)의 시대가 열려 진나라는 단 2대만에 무너진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농민봉기는 뭐니뭐니해도 ‘황건적의 난’이다. 서기 184년 황건적(黃巾賊)은 수십만 군세를 휘몰아 400년을 이어진 한(漢)나라 멸망의 단초를 닦게 된다.


당시 황제였던 영제(靈帝)는 ‘암군’의 대명사격인 인물로 그는 앞장서서 ‘매관매직(賣官賣職)’ 즉 돈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 민가에서 자라난 그는 황제가 되면 국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국고출납에는 황제라 해도 엄격한 절차가 있다는 점을 알자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


황제와 그 비선실세인 십상시(十常侍)에게 거액을 바치고 태수(太守) 등 벼슬에 오른 관리들은 ‘본전’을 되찾기 위해 농민들 재산을 가혹하게 수탈했으며 결국 이는 대규모 봉기로 이어진다. 황건적의 난은 진승·오광의 난과 마찬가지로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지만 조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지방군벌들이 난립하는 토대를 제공해 한나라는 결국 무너지고 위촉오(魏蜀吳) 삼국으로 분열되고 만다.


▲ 명태조(明太祖) 주원장의 모습.


‘정권교체’ 농민봉기도 있어
동서양 농민봉기 공통된 원인 되짚어야


농민반란에 참여해 ‘황제’에 오른 인물도 있다. 바로 ‘걸인’ 출신으로 사회 최밑바닥에서 시작해 명(明)나라를 세운 ‘인간승리의 끝판왕’ 주원장(朱元璋)이다.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의 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쉬었다고 한다. 대륙을 지배하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칭기즈칸(Chingiz Khan) 시절의 선정은 온데간데 없이 부패해 많은 농민들이 고통받는 나라로 변질된 상태였다.


소년 시절 지주의 소를 치는 등 잡일을 하며 지내던 주원장은 17세가 되던 무렵 심한 가뭄이 들고 집에 줄초상이 나 부모와 큰형을 잃고 졸지에 고아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훗날 그 시절을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다. 살아남은 자는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어 고통당하고 역병에 걸려 죽은 자는 시신을 매장할 땅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게 된 주원장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탁발승이 된다. 당시의 탁발승은 말이 승려이지 사실상 걸인 취급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멸시를 받으면서도 고개를 조아려 밥을 구걸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의 인생이 뒤바뀐 건 서기 1352년 무렵 홍건적(紅巾賊) 장수였던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부터다. 일개 졸병으로 최전선에서 싸우던 주원장은 공훈을 쌓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세력의 2인자에까지 오른다. 곽자흥은 농민들로부터 지지받는 그를 두려워 해 자신의 양녀를 주고 사위로 삼는다.


여담이지만 부인 마씨(馬氏)도 가난한 집 출신이라 당시 상류층 여성들의 유행이었던 전족(纏足)을 하지 못해 황후가 된 뒤 백성들로부터 ‘큰발 마황후’라고 놀림받았다. 하지만 성격은 슬기롭고 인자해 그녀를 평생 사랑했던 주원장이 어느날 백성들의 놀림소리를 듣고 이들을 모두 처형하려 하자 앞장서서 말리기도 했다. 그녀와 금슬이 좋았던 주원장은 훗날 부인이 사망하자 폭주해 공신들을 때려잡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군벌로 입지를 다진 주원장은 군벌 간의 대규모 수전(水戰)이었던 ‘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陳友諒)의 대군을 격파하고 오(吳)나라를 세운다. 약 3년 뒤인 1367년 양쯔강(揚子江) 이남의 강남지역을 모두 평정한 그는 수하장수들에게 25만 대군을 맡겨 북벌에 나서게 한 뒤 1368년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해 명나라를 건국한다.


상술한대로 주원장은 부인 마씨가 사망한 뒤 공신들을 쥐 잡듯이 숙청했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영향인지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의 재위시절 경제적 기반을 다진 명나라는 마테오 리치(Matteo Rocci) 등 서방선교사들까지 찬탄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세계일류 국가로 발돋움해 17세기까지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서 서양에서도 농민봉기는 발생했다. 15세 이상 백성들에게 부과된 인두세(人頭稅), 즉 사람 머릿 수대로 세금을 걷는 정책에 더해 봉건영주들의 수탈에까지 시달려 피폐한 삶을 살던 영국 농민들은 1381년 와트 타일러(Wat Tyler)라는 인물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킨다. 일부 세력은 수도 런던까지 점령할 정도로 세를 과시했지만 동년 6월 타일러가 암살됨에 따라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다가 각개격파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민봉기의 공통된 원인은 ‘그릇된 정부정책’과 ‘불통’이었다. 명군(名君)은 수시로 전국을 암행하면서 민심을 읽고 그들의 고통해결에 힘 썼지만 암군(暗君)은 민심을 읽는 대신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 바빴다. 그 결과는 정권붕괴이거나 최소 붕괴의 기반제공이었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했다. 정부가 암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서는 요즘 말로 ‘뇌피셜’ 대신 현실을 직시하고 농민과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정책마련에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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