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분의 ‘소금고기’ 포만감의 ‘벽돌건빵’ 그리고 질병예방의 ‘양배추’

▲ 청(靑)나라 건륭제(乾隆帝)와의 무역협상에 나선 영국의 조지 맥카트니(George McCartney). 유럽 측 시각에서 그려져 청나라인들의 모습이 다소 부정적이다. 맥카트니가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만 엎드린다”며 황제에 대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거부함에 따라 협상은 결렬된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은 맥카트니 뒷편의 영국인이 엎드린 모습에서 보듯 당시 영국에서는 ‘차이나파워’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널리 알려지다시피 글로벌시대는 유럽의 대항해시대(Era dos Descobrimentos)가 시발점(始發點)이다. 중동세력 부흥으로 비단, 도자기, 차(茶), 향신료 등 중국, 인도와의 교역로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유럽은 총칼을 앞세워 해상교역로를 닦기 시작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이른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말의 어원이다.


유럽 각 국은 아시아, 남·북미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착취, 기술발전, 독립 등 파란만장한 과정 끝에 전세계가 ‘1일 생활권’으로 묶이고 본격적인 자유무역시대가 열린다. 이 시대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대표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오로지 제조, 수출만으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한민족 역사상 우리나라가 이같은 부흥기를 맞은 건 사실상 처음이다.


중국 등 동아시아가 폐쇄적이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부유했기’ 때문이다. 명·청(明靑) 등 중국 역대왕조는 거대한 영토,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했기에 타국과의 무역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221년에 이미 진(秦)나라로 통일왕조를 이룩한 중국과 달리 사분오열된 채 상대적으로 자원부족에 시달린 유럽 각 국에게 무역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이 그러했다. 유럽에는 생산기술이 없는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7~18세기 프랑스에서는 중국풍 미술품인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귀족층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차는 지금도 영국인들의 필수 기호식품이다. 영국군은 훗날인 1899~1901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진압 때 베이징(北京)에 입성하면서도 ‘중국산 홍차’를 마셨다.


우리 역사책에는 유럽열강의 아시아 침탈만이 부각되지만 서방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중국을 ‘잠자는 용(龍)’으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명·청 두 왕조 시기 중국을 찾은 유럽 선교사들은 ‘대륙의 힘’을 본국에 전파했다. 앞서 원(元)나라 때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중국찬양 일색인 ‘동방견문록(Divisament dou Monde)’을 저술해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한다. 이 동방견문록은 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 문 닫고 그들만의 사치를 누리느라 정작 시대변화에 뒤쳐진 중국의 실상을 서방이 알아차린 건 1894~1895년 발발한 청일(靑日)전쟁을 통해서다.


물론 유럽은 그 이전인 1840~1842년 1차 아편전쟁, 1856~1860 2차 아편전쟁 등에서 중국에 승리한 바 있다. 전세계 은자(銀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던 대영(大英)제국은 급기야 ‘아편’을 팔아 만회하려 했으며 이에 청나라 조정이 반발하자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중을 기하며 관망만 하던 유럽은 청일전쟁에서 일본 같은 ‘작은 나라’에게마저 중국이 패하는 것을 보자 비로소 연합군을 구성해 의화단운동에 개입하는 등 대륙을 갈기갈기 찢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시 역전됐던 유럽과 중국 경제는 약 100년만인 20세기 말 들어 다시금 뒤집혔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G2’로까지 부상했다. 유럽은 경제위기를 겪을 때마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인 중국이 달러를 풀어주기만을 바라며 눈치를 보고 있다. 한계를 느낀 유럽은 1993년 유럽연합(EU)을 출범시키고 중국과 같은 거대한 단일경제권 구축을 도모했지만 근래 영국이 브렉시트(Brexit)를 통해 EU 탈퇴를 선언하는 등 많은 진통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 염장고기의 실제 모습. 보는 이에 따라서 다소 충격적일 수 있으니 주의.


소금고기와 벽돌건빵, 유럽인을 바다로 이끌다


상술한대로 글로벌시대를 연 관문은 대항해시대이다. 그러나 이 때 유럽이 순조롭게 전세계로 뻗어나간 건 아니었다. 혹독한 희생과 고통이 뒤따랐다. 당시 기술로서는 대서양, 인도양 등 거대한 대양(大洋)을 건너 옆 대륙으로 간다는 건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실제로 무수한 사람들이 항해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범선(帆船)을 이용한 오랜 항해에서 무풍(無風)지대나 태풍과의 조우 등 갖가지 난관이 기다렸지만 가장 곤란한 건 뭐니뭐니해도 ‘식량보급’이었다. 식수는 비가 내릴 때마다 받아서 보관하거나 섬에서 보충하면 된다. 하다 못해 럼주 등 술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다. 범선을 움직일 바람이 없는 지역, 태풍이 부는 지역에 당도하더라도 식량만 있다면 바람이 다시 불 때까지, 태풍에서 벗어날 때까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식량이 없으면 이 모든 게 불가능해진다.


언뜻 생각하면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면 되지’라고 여길 수 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게 ‘현장조달’이다.


대항해시대 범선에는 어부가 아닌 ‘군인’이 탑승한다. 자연히 조업기술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어디까지나 ‘군함’이기에 조업도구로 선내를 꽉꽉 채워넣는 대신 ‘함포’ 등 무장이 우선시된다. 어부가 아닌 사람이 소량의 그물로 잡아올린 얼마 간의 물고기로 최소 수백명의 수병(水兵)들을 ‘매 끼니’ 배불리 먹일 수는 없다. 무인도에서의 수렵·채집도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유인도(有人島)를 만나 보급받을 날만 기다리며 손 놓다가는 대번에 ‘선상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뱃일’은 극한의 육체노동을 요구하기에 충분한 영양보충은 필수적이다. 학대가 만연한 특유의 ‘병영문화’로 악명 높았던 구(舊) 일본해군마저 영양보충을 위해 ‘카레라이스’라는 신메뉴를 만들어 수병들에게 배급할 정도였다. 그만큼 수병은 ‘먹을 것’을 필요로한다. 만약 현장조달이 해답이었다면 수천~수만년의 그 긴 시간 동안 군사를 이끌고 장거리원정에 나섰던 그 많은 치자(治者)들이 보급에 ‘골머리를 앓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때 머리를 싸매고 식량보급 방법을 찾던 유럽인들은 두 가지 식재료에 주목한다. 바로 ‘건빵’과 ‘고기’다.


잘 알려지다시피 건빵이 딱딱한 건 장기보존을 위해 수분을 빼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다에는 해풍(海風)이 존재하기에 약간의 수분이라도 존재하는 건빵은 배에 싣고 출항하면 얼마 못 가 눅눅해져 썩고 만다. 이에 유럽인들은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뽑아낸 ‘쉽비스킷(Ship Biscuit)’이라는 ‘극한의 건빵’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다.


이 쉽비스킷이 얼마나 ‘단단’했냐면 심지어 ‘흉기’로 쓰일 정도였다. 식감이 벽돌과도 같아 자연히 씹는 건 불가능했으며 때문에 물에 풀어 죽처럼 끓여먹었다. 밀도가 높은 쉽비스킷을 물에 풀 경우 양이 대폭 늘어나 소량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단단한 건빵에도 바구미 애벌레가 들끓는 경우가 잦았지만 수병들은 단백질 섭취(?) 겸 눈물을 머금고 ‘건빵죽’을 먹었다.


가혹한 육체노동에서 빵만 먹고 견딜 수는 없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살아있는 가축을 배에 실을 경우 얼마 못 가 동이 나는 건 물론 배멀미 끝에 줄줄이 죽어나간다. 가축에게 먹일 건초 등을 실을 공간의 여유도 없다. 설상가상 배설물을 방치할 경우 전염병이 돌게 된다. 이에 유럽인들은 선상 육류섭취를 ‘염장고기(Corned Beef)’로 해결했다.


염장(鹽藏)고기는 이름 그대로 ‘소금을 친 고기’다. 소금이 뿌려질 경우 삼투압현상에 의해 수분이 빠져나가 장기보존이 용이해진다. 그런데 이 염장고기를 우리가 흔히 먹는 ‘소금구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염장고기 제조의 1차 목적은 당연히 ‘맛’이 아닌 ‘보존’이었으며 때문에 세균이란 세균은 모조리 죽이기 위해 말 그대로 ‘소금물’에 푹 절이기를 반복했다. 소금도 모자라 초석(硝石)도 듬뿍 발랐다.


자연히 이 건 ‘사람 먹을’ 물건이 아니었다. 극한의 짠 맛은 불쾌감을 넘어 ‘재앙’이었다. 색깔은 ‘인분’을 연상케 하는 누런 색이었다. 수병들은 일단 염장고기를 물에 ‘씻은’ 뒤 삶아 먹었지만 식수도 부족한 판에 ‘고기 씻을 물’이 넉넉할 리 없었다. 바닷물에 씻을 경우 짠 맛은 ‘배’가 된다.


그래서 수병들은 획기적인 ‘퓨전음식’을 개발한다. 쉽비스킷 죽에 염장고기 소량을 풀어 끓인 ‘랍스카우스(Lobscouse)’라는 죽이다. 색깔은 여전히 ‘인분’이었고 맛은 ‘뭣’ 같았지만 여러 걱정 없이 안심하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요리는 2003년 헐리웃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 위대한 정복자(Master and Commander : De l'autre côté du monde)’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궁금하다면 보도록 하자. 영화 자체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 제임스 쿡(James Cook)과 그의 범선.


줄초상을 해결한 만병통치약, 양배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빵과 고기를 충분히 배급받음에도 선원들은 여전히 줄줄이 쓰러졌다. 바로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괴혈병(壞血病)이다.


1741년 리처드 워커(Richard Walker)는 기록(출처 ‘역사의 원전’. 바다출판사)에서 선상 괴혈병 확산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르 메르 해협을 지난 얼마 후부터 선상(船上)에 하나둘씩 괴혈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래 계속된 항해기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선원들에게 쌓인 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여건으로 인해 괴혈병은 매우 급속히 퍼져 4월 말까지는 이 병에 조금도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4월 한 달 동안 센추리언 함상(艦上)에서 무려 마흔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우리는 그 질병이 최악의 상태에 와 있었고 북쪽으로 올라옴에 따라 기세가 수그러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5월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4월보다 곱절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6월 중순에나 상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200명 이상이 죽은 뒤에는 앞 돛대 당번으로 근무능력 있는 사람을 여섯 명밖에 배치할 수 없었다.


<중략> 가장 특이한 현상은 단 하나의 사례만 가지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인데 여러 해 전에 아물었던 상처가 이 지독한 병에 걸리면 도로 터져 버린다는 것이다. 센추리언호에 탄 노약자 한 사람에게 가장 놀라운 사례가 나타났다. 그는 50여년 전 보인 전투에서 부상당한 일이 있고 바로 치유돼 그 긴 세월 동안 아무 일 없었는데 그가 괴혈병에 걸려 병이 진행됨에 따라 옛 상처가 도로 터져버린 것이다. 마치 아물었던 일이 없는 것처럼 된 경우다.


아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도 있었다. 부러졌던 뼈가 이어져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것이 괴혈병 앞에서 풀어져 버려 접골(接骨)이 안 된 상태로 되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데 자신감을 얻어 그물침대 밖으로 나가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가 갑판에 닿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갑판을 걸어다니고 약간의 일도 할 수 있던 사람이 힘을 바짝 쓰는 일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쓰러져 죽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항해 동안 많은 우리 선원들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괴혈병 유행 원인이 ‘채식부족’으로 규명된 건 1753년이다. 육지에서는 채소를 흔히 접할 수 있기에 괴혈병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비좁은 배에는 병력, 무기, 식수, 건빵, 고기와 스트레스 해소용 술에 이어 채소는 미처 실을 여유도, 생각도 없었기에 괴혈병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에 해군 수뇌부는 소금에 절인 양배추인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범선에 싣도록 하지만 선원들의 큰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별 걸 다 먹이려 한다”는 지적에서부터 “고기배급량을 줄이려 한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불만까지 터져나왔다. 특히 영국이 그러했다. 축구장 난동으로 유명한 ‘훌리건(Hooligan)’의 사례에서 보듯 영국 서민층 남성들은 ‘남자다움’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다. 또 영국요리는 간소하기로 ‘악명(?)’ 높다.


선원들의 저항이 커질 경우 선상반란 등 위험이 있었기에 강경책을 쓰기도 어려웠다. 수뇌부가 강경하게 나간 경우는 구 일본해군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에 18세기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인간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쿡은 출항 후 일부러 장교들에게만 자우어크라우트를 대량배급하고 수병들의 것은 확 줄여버렸다. 처음에는 양배추 시식을 거부하며 남자다움을 과시하던 수병들은 점차 “장교만 먹는 걸 보니 귀한 게 틀림없다”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수병들은 앞장서서 ‘장교와 수병 간 동등한 양배추 배급’을 요구하기에 이르며 ‘채식’은 해군에 정착하게 된다.


유사사례로 동양에는 각기병(脚氣病)이 있다. 비타민B 복합체 중 하나인 비타민B1 결핍으로 인한 증세로 쉽게 말해 도정된 백미(白米)만 먹을 경우 발생한다. 근대 들어 각기병에 시달린 곳은 이미 여러차례 언급된 구 일본해군이다.


쌀밥을 먹은 수병들이 나가떨어지는 현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국유학을 다녀온 군의관 다카기 가네히로(高木兼寬)는 장교와 수병 간 식단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가 해군성 동의를 얻어 수병식단을 혼분식 또는 양식(洋食)으로 바꾼 결과 우리나라와 전세계 많은 나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구 일본해군에서의 각기병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전투력이 갖춰지자 구 일본해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드웨이(Midway)해전 등 미국과 일전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약 10만명의 미 해병·육해군 장병이 목숨을 잃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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