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지난 한해를 곰곰이 되돌아보고, 반성할 건 반성하면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자는 뜻이 송구영신의 지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여러 방법이 있겠으나 우리는 흔히 지난해에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들었던 말들을 음미하면서 한해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어떻게 작년 한해를 살아왔는지 가늠해보자.

우선 교수신문이 대학교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선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첫해인 2017년의 사자성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었다.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하라는 뜻으로 새 정부의 개혁 적폐청산과 연관된 것이었다.

2018년 사자성어로 교수들은 임중도원(任重道遠)을 선정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 집권 2년차 문재인정부의 할 일은 많으나 이를 이루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의미다. 개혁이나 정책에 반대와 저항도 적지 않고 풀어야할 과제가 첩첩산중이라는 걱정이 아른거린다.

특히 지난해엔 서민들 먹고 살기가 전례 없이 팍팍했다. 그러다보니 답답한 말들이 우리와 함께했다. 1년 내내 최저임금 소득주도성장 노동시간단축 민노총 등등 경제정책과 관련한 논란이 우리를 짜증나게 했다.

그러면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운 현상이 이어지면서 고용절벽이라는 처절한 단어가 가장 많이 회자됐다. 저소득층을 위한다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은 오히려 일자리를 앗아갔다는 비난이 일었고, 그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너무 속도가 빠르다는 비난을 받아온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은 견디지 못하고 고용을 줄이거나 아예 폐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죽하면 자영업자들이 길거리로 나와 정책불복종 움직임까지 보였을까.

한편에선 고용세습이라는 말이 터져 나와 서민들을 분통 터지게 했다.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귀족노조 친인척이나 임직원 자녀가 특혜를 받고, 채용에도 노조원 자녀가 우대받는다는 철밥통 세습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조금 더 기다리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 저소득층의 생활이 나아지고, 일자리도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지만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기만했다.

육동인강원대초빙교수(직업학박사)는 신문 기고에서 ‘실업은 죽음에 버금가는 충격이다. 실업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식, 배우자, 부모의 사망에 이어 4번째로 아프다고 말한다’고 했다. 고용절벽 상황에서 실업의 아픔은 무엇에 비길 수가 있겠는가. 몇 달 몇 년을 기다려달라는 배부른 호소에 절망할 것이다.

이 교수는 실업의 공포를 ‘황무지 증후군’이라고 했다. 연말이 되면 기업에선 승진과 함께 구조조정이 흔히 진행된다. 다행히 승진이나 해임 통보에선 벗어나 간신히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언제 자기에게도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 이른바 ‘남은 자 증후군’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서민 근로자, 영세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에게 과연 새해에는 햇볕이 들 것인가. 이런 걱정으로 맞는 서민들에게 희망적인 말은 찾기 힘들다. 연말에 문재인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지지율이 긍정평가를 앞지르는 이른바 데드크로스까지 발생하여 더욱 불안한 예감을 갖게 한다.

영국에선 매년 연말이면 주요 사전 출판사들은 ‘올해의 단어’를 선정, 온라인 사전에 추가한다. 케임브리지 사전은 2018년 단어로 ‘nomophobia'를 뽑았다. ‘no mobile phone phobia'를 합성해 줄인 말로 ’휴대폰이 없거나 사용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걱정’을 뜻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toxic'을 선정했다. ‘유독성(有毒性)’을 의미하는 이 형용사는 정치인이나 문화계인사 관료들의 행태를 묘사하는 데도 두루 쓰였다고 한다.

콜린스 사전은 ‘single-use(1회용)’를 선정했다. 플라스틱병이나 비닐봉지 빨대 등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으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준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justice(정의)’를 꼽았다. 사회정의 경제정의 인종적정의를 두고 논란이 많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여전히 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영국이라고 한해를 상징하는 단어가 밝고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만 유일하게 암울한 단어들이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절박한 용어들이라는 점에서는 서글픈 느낌이다. 새해에는 좀 더 밝고 희망에 찬 단어, 말 말 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위원
(현)언론진흥재산 기금운용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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