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철도 커피 자판기 옆 ‘책 자판기’ 나란히

철도유통사 관할 신길역에 커피 자판기와 함께 나란히 배치된 '책 자판기' 사진=채지혜 기자
자동판매기에 돈을 넣고 책을 빼 읽는 시대가 열렸다.

이른 바 '책 자판기'가 지난 6월 첫선을 보이면서 최근 각 지하철역에 속속 설치되면서 우리 생활권 안으로 성큼 들어선 것.

책 자판기'를 처음 접하는 시민들은 한결 같이 쉽사리 눈길을 떼지 않고 구입하는 이들이 있으면 그 과정을 유심히 곁눈질로 살펴 보는 반응을 보였다.

기특하게도 이 자판기는 '미리보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권당 2천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지만 목차라도 보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게다가 역사임을 감안해 T머니 카드로도 결제 가능하며 신용카드 역시 사용할 수 있다. 현금은 물론이다.

올 하반기 본격적으로 철도역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한 이 '책 자판기'의 행보는 어떠할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 “자판기 특성에 책을 맞췄다”= '책 자판기'는 자판기 회사인 희망과 재미 그리고 책 콘텐츠를 제공하는 김&정 출판사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사실 이번 책 자판기의 경우 국내 시장에 첫 선을 보인 아이템은 아니다. 십여년 전 한때 실험대 위에 올랐었으나 참담히 실패한 전력이 있는 아이템인 것.

이는 서점에서 살 수 있는 책들과 가격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동일했기에, 소비자가 해당 책의 목차 정보라도 간략히 훑고 사기 위해 자연히 서점으로 발길이 행하게 돼 있는 구조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백경 희망과 재미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올 4월 책 자판기 설명회를 가진 이후 6월에 첫 설치, 현재 23대가 수도권 철도역에 배치됐다고 설명했다. 신도림역, 구로역, 영등포역, 개봉역, 대방역, 보정역, 화서역, 평택역 등 이다.

노 대표는 앞서 실패한 사례가 있음에도 이같은 책 자판기를 기획하게 된 배경에 대해 “책 자판기는 서점 유통 채널의 틈새를 공략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책 자판기는 현재 일본에도 이미 나와 있는 제품이지만 소위 신주쿠 뒷골목표 야한 잡지나 만화 전문 자판기로만 전락한 것이 현실”이라면서 “이는 우리처럼 자판기 특성에 잘 맞는 책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판기에 책을 우겨 넣은 결과 초래된 현상”이라고 이전 실패 사례들에 대해 짚었다.

노 대표는 “현재 23대가 배치됐지만 연말까지 50대로 확정됐으며 내년 상반기 200대를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며 “최소 200대 정도만 정상 운영되면 지금 한달 단위로 나오는 책들도 주간지 수준으로 제작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손익분기점이 형성돼 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가능해 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사실 책 자판기에 관심 갖고 하겠다는 개인 사업자가 많지만 국내 자판기 시장이 워낙 엉망이라 일반 분양은 당분간 하지 않고 심사숙고해 한 곳 한 곳 차분히 내실을 다져가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간 S사나 L사 등 국내 대기업들의 밀어붙이기식 자판기 판매 구조로 심지어 무주 구천동 10가구 사는 마을에도 자판기를 들여 놓게끔 만들어 놨다는 것. 여기서 나오는 피해는 자판기 개인사업자와 소비자가 결국 고스란히 짊어지게 되기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경영 방침이다.

◆ “책 읽기 대중화에 앞장 서겠다”= '책 자판기'의 알맹이인 책 콘텐츠를 책임지고 있는 김영수 김&정 출판사 대표는 "해당 장소에 맞는 책을 다 양하게 만들어 책 읽기 대중화에 앞장 서겠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작 방향을 밝혔다.

김 대표는 손꼽히는 국내 유명 출판평론가이기도 하다. 3년 전 김&정을 세운 김 대표는 '연하도서'로 업계 인지도를 쌓아 오다가 이번 책 자판기 콘텐츠 제작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

목차 미리보기 기능 제공하고 있는 '책 자판기' 사진= 채지혜 기자

김 대표는 “현재 50여종의 책이 발간됐으며 책 자판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0여종 정도”라면서 “권당 1쇄에 5천여권을 찍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지난달 매출의 경우 영등포역에서 1천5백권 팔린 것 포함해 전체 1만8천권이 나갔다”면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말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인데 3쇄까지 찍었으니 1만5천권이 시장에 소화됐다”고 덧붙였다.

김&정 출판사 자체 시장 조사 결과 40~50대 '아줌마'들이 주요한 독자층으로 밝혀졌는데, 실제 이들이 서점에 들어가 책을 살 확률은 굉장히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현상은 특기할 만하다.

책을 살 수 있는 문턱을 낮추고 장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이 '책 자판기'의 향후 가능성 또한 높이 살만 한 것.

이제 시작이라는 김 대표는 “현재 철도유통사로만 책 자판기가 들어가고 있는 것은 역마다 관리사가 따로 있는 시스템의 편의성 때문”이라며 “그러나 곧 서울, 부산지하철과도 협의가 이뤄지고 있으며 향후 터미널, 공항, 병원 등 인파가 많고 대기 시간이 긴 곳은 어디든 무난하게 영역 확장이 가능하다”고 이 사업의 미래에 후한 점수를 매겼다.

더욱이 책 자판기가 놓이는 장소에 따라서 다양한 책 콘텐츠를 생산해 나가겠다는 것. 예를 들면 병원에 책 자판기를 설치했을 경우 그곳에 들어가는 책 콘텐츠는 의학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다.

김 대표는 “향후 3년 정도는 현재의 권당 2천원 가격을 고수할 것”이라며 “용지를 규격화하는 등 최대한 원가 절감에 도전해 1천원 정도에 팔아도 손해보지 않을 정도로 원가를 낮춘 게 획기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재 출판 시장의 책 가격은 너무 부풀려져 있다”면서 “대개 책 원가는 원고료 등을 모두 포함해 현재 시장 정가의 30% 미만인데 각종 위험부담까지 소비자가 모두 지고 있는 것”이라고 출판평론가 다운 쓴 소리를 했다.

그는 또 "책이 얇아 자칫 다이제스트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두 독립적인 단행본"이라면서 "내가 출판평론가이니만큼 책의 퀄리티에는 자신있다"고 콘텐츠 질에 관한 논란을 일축했다.

현재 책 자판기에는 문학과 경제처세술을 다룬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 이달 말에 출시되는 '세계미스터리걸작선 시리즈'까지 더해지면 한층 풍성해질 전망이다.

십여년 전 헛디덨던 발걸음을 이제 새롭게 다잡고서 자리매김 중인 '책 자판기'가 책 시장의 대중화에 얼만큼의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행보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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