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의 산 증인, 4번의 도전 끝에 대선 승리

지난 달 13일 폐렴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급성호흡곤란증후군과 폐색전증, 다발성 장기부전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객임에는 틀림없으나 정치 9단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 그는 권모술수를 당할 자가 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까지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맹비난했던 한나라당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18일 청와대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참모진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며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은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고 지난 40여 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 날 오후 빈소를 방문해 “아쉽다. 우리나라 큰 거목이 쓰려졌다”며 “오랜 동지요, 오랜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가슴 아프다. 평생 화해와 경쟁을 같이했던 사이"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정치권, 나아가 온 나라가 슬퍼하는 것은 그가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이 워낙 크고 파란만장한 과거를 뒤안으로 하고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에 '투데이코리아'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을 정리했다.

출생에서 정치 입문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 씨와 어머니 장수금 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하의도에서 10세 때까지 서당을 다녔다.

그 후 소년 김대중은 당시 전국에서 손 꼽히는 명문 학교였던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고 지난 1943년 12월 이 학교를 졸업했다.

목포공립상업학교 시절 소년 김대중은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줄곧 반장을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20대 초반의 청년 김대중은 흥국해운이라는 해운 회사를 차려 10년 동안 경영했고 지난 1948년 10월에서 지난 1950년 10월까지 목포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지 돈 잘 버는 유능한 청년 사업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청년 김대중의 일생을 한 순간에 뒤바꿔 놓았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지난 1952년 5월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산 정치파동은 청년 김대중이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안이 반동으로 몰려 북한군에 붙잡혀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지난 1950년 9·28 수복 당시 북한군들이 후퇴하면서 수용자들을 학살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학살 당하기 직전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그의 일생에 있어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 청년 김대중은 지난 1954년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로써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그는 낙선했고 지난 1959년 6월 강원도 인제에서 실시된 국회의원 재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또한 지난 1960년 7월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3번째로 낙선했다.

이 기간 중 계속된 낙선으로 인해 청년 김대중은 사업하면서 모은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씨도 남편의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어 그만 세상을 떠나는 뼈저린 아픔을 겪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63년 11월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정치에 입문한 지 9년, 3번의 낙선 끝에 청년 김대중은 가까스로 야당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첫 번째 대권 도전, 전국적 인물로 부상

30대 청년 의원 김대중은 의정활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난 1963년 12월 제6대 국회가 개원한 후 6개월 동안 본회의 최다 발언 의원이 됐고 주요 현안마다 그는 날카로운 추궁과 치밀한 대안 제시로 정부여당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964년 당시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5시간 동안 연설한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시기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지 유능한 야당 의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의원이 제창한 '40대 기수론'을 계기로 그는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지난 1969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강행한 직후 김영삼 의원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정치사에 길이 남을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가 지난 1970년 9월 29일 개최됐다.

이 날 전당대회에서는 김영삼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었다.

당시 김영삼 의원은 신민당 원내총무로서 당시 유진산 당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 의원은 재석 대의원 885명 중 421표, 김대중 의원은 382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82표였다.

즉 김영삼 의원이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이 빗나가고 과반수 득표를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2차 투표가 실시됐고 2차 투표에서 재석 대의원 884명 중 김대중 의원은 458표, 김영삼 의원은 410표를 얻어 김대중 의원은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지난 1971년 4월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에 의한 한반도 안전 보장, 예비군제 폐지, 이중곡가제 실시, 공산권과 북한과의 교류 추진 같은 전진적인 공약을 제시해 큰 인기를 얻었으나 그만 약 95만표차로 낙선했다.

이 때부터 김대중 의원은 전국적인 야당 지도자이자 박정희 정권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으로 떠올랐고 망명, 투옥, 정치규제 등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사형선고, 망명, 2번의 대권 도전 실패

지난 1972년 박정희 정권은 영구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유신 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지난 1973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또 다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던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는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됨으로써 막을 내리고 우리나라에는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전두환 씨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5·17 계엄확대 조치를 감행한 다음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 시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지난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신군부 세력에 의해 체포된 후 그 해 11월 내란 음모 혐의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을 반대하는 국세사회의 압력은 거셌고 이에 힘입어 그는 지난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지난 1982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내렸고 그 해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을 단행해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게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해 3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을 결성하고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타도 투쟁을 이끌었다.

그 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지난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에 항복해 야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지난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 직선으로 실시되게 됐다.

당시 온 국민들은 '이번에야 말로 지난 27년간 이 나라를 철권 통치하며 헌정을 유린하고 갖가지 인권 유린을 자행한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끌어 올랐다.

이 열망은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의 후보 단일화 요구로 표출됐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국민의 열망을 끝내 외면하고 야당을 서로 갈라 각자 대선 후보로 출마했고 제13대 대선에서는 신군부 출신인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에 대한 비판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지난 1988년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해 그는 가까스로 재기할 수 있었다.

그 후 지난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후보로 출마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겨뤘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3번의 대선 패배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대통령 당선, 한국 최초로 노벨상 수상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지난 1995년 7월.

그 해 실시된 6·27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뒀고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에 중요한 발판이 됐다.

그 해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다음 그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했다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생애 마지막 대권 도전에 거침없이 나섰다.

마침내 지난 1997년 12월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 때 터진 IMF 사태는 국가적으로는 큰 불행이었지만 그에게는 대선 승리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줬고 여기에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공조까지 더해 그는 마침내 4번의 대권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그에게는 일생의 목표를 이룬 감격이었고 국가적으로는 건국 이래 최초로 선거에 의해 집권당이 바뀌는 진정한 정권교체의 실현이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적어도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확고해졌다는 것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IMF 위기 조기 극복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으로 남·북 정상회담 성사시키고 6·15 남·북 공동선언 발표하는 등 남·북 관계 진전시킴 ▲정치적 민주화의 획기적 진전 ▲한국 최초로 노벨상 수상해 국위 선양 등의 업적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에 반해 ▲IMF 위기 조기 극복 과정에서 대량 실업 발생과 고용 불안전성 심화 ▲외국 자본의 영향력 강화 ▲대북송금 등의 오점도 남겼다.

퇴임 후 이명박 대통령 맹비난, 여권으로부터 집중 공격 받아

퇴임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을 맹비난했고 그 때마다 여권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초 '용산참사'가 발생한 직후인 지난 1월 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교동 자택에서 민주당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용산참사'에 대해 “민주주의가 반석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지난 1월 23일 국회에서 개최된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전직 대통령까지 도시 빈민에 대한 대책은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정치공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참 보기 좋지 않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위원회' 주최로 서울 63빌딩에서 개최된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 특별강연'에서 “이명박 대통령께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며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하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지난 6월 12일 국회에서 개최된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말없는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발언들을 자제하고 이제 침묵을 지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투데이코리아 이광효 기자 leekhyo@today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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