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실천문학사 대표이사 겸 소설가

지난 1980년 3월에 창간해 오늘에 이르는 '실천문학사'는 실존하는 '역사의 증인'이며 '살아있는 화석'이다. 그 뜨거웠던 시대를 말 그대로 '실천' 문학으로 버텨 왔다. 특히 진보적 지식인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작가들도 다수 배출하면서 민중·민족문학의 최전선에서 시사쟁점들을 이끌어 왔다.

오늘날 민중문학의 마지막 진영으로 첫손에 꼽는 실천문학사 대표 김영현(53) 소설가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특별했다. 그는 이문구, 송기원에 이어 3대 문인출신 실천문학 발행인으로 어느새 10년 남짓 실천문학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동거를 해 왔다. 지난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실천문학사에서 만난 김영현 대표는 4년 만에 선보이는 따끈한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과 함께 였다. 여기엔 지난 90년대 '김영현 논쟁론'으로 문단의 화두를 이끌었던 그의 농익은 내공이 '번쩍'인다.


◇ 신작 '낯선 사람들'이 묻는 실존적 사랑

-장편소설은 '폭설'(창비) 이후 4년 만이다. 오랜만의 장편인데 소감은.

▲내가 다작을 하는 작가는 아니다. 4년 만에 냈다고 하면 게으르다고 볼 수도 있다. 내 독자는 '김영현 논쟁론'이 나왔던 주로 80~90년대 학번까지다. 격동의 세대를 함께 겪었던 이들이 과연 지금의 변해가는 이 소설을 보면서 자기들도 변해가고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일까 가장 궁금하다.

-신작의 흡입력이 좋다. 추리소설 기법도 한몫했는데, '잘 읽히는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전 작품들이 주제가 무거웠다. 내가 그 당시 운동권으로 힘들게 한 시대와 버텨 왔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작가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회적 문제를 많이 제기해 왔고 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을 주제로 다뤄왔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은 '역사피로증후군' 마냥 싫어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도 접근할 수 있는 게 필요하겠다 싶었다. 우리나라 소설은 일본문학 등에 비해 굉장히 빈곤하다. 독자들에게 우리문학도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추리기법이 주의를 끌기에는 가장 신선하다. 다행히 독자들이 전체 얼개가 재미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가볍게 느껴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본다. 쉽게 읽히면서 메시지 전달이 잘 돼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의 문제 혹은 선과 악의 문제 등이 범인이 누구냐 보다는 중요하게 다뤄졌다.

-박완서 작가도 신작 서평에 읊었듯 사실 추리소설 기법을 우리문단에서는 그리 반기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문학도 상품화되다 보니 추리소설과 같은 장르문학 따로 평론가들을 위한 순수문학 따로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같이 가야 할 길이다. 사실 추리소설 기법이 쉬운 건 아니다. 구성적 치밀함과 사건 전개의 논리성 등 까다롭다. 우리나라만 그렇지 '죄와 벌'과 같은 고절소설에서도 추리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유독 추리소설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신작 표제를 '낯선 사람들'로 정한 까닭은.

▲제목 때문에 고심을 많이 했다. 처음엔 '안나'로 하려 했다. 안나는 이 소설에서 그리움의 표상이다. 안나라는 존재를 통해 이성적인 사랑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굉장히 높은 경지로 오른다. 그러나 느닷없다는 말들이 있어서 연재 당시 제목이었던 '낯선 사람들'로 정했다. 실존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던져진 존재들로서 다른 인간과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동연, 성연, 수길, 연옥 등 가가의 운명들이 만나 파노라마를 일으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은 굉장히 실존적인 제목이나 대중성이 없긴 하다.

-이 책의 화두를 쥔 최성연은 신부가 될까. 가능성을 열어뒀는데.

▲사회정의를 실천하려 감옥에 가고 고문도 당하면서 공동체적 삶이 나의 전부였을 때가 있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니 출세 혹은 출가도 생각하게 됐다. 한편으론 내가 그렇게 이루려 했던 것들이 민주화가 됐음에도 잘 이뤄지지 않아 그 한계성에 은둔도 생각했다. 요즘 지식인들의 문제가 뭐냐하면 자꾸 은둔하려 한다. 영양가 없는 친구는 떠들려고만 하고. 난세에는 그렇다. 공자적 삶과 노자적 삶, 이 두 가지가 긴장된 채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성연의 경우도 신부가 돼 세상을 섬기는 길도 있고 수사가 돼 세상을 숨기는 방법도 있다. 그걸 짊어지고 가는 걸 사랑이라 본다. 성연에게는 아직도 수도원에 대한 외경이 남아 있다. 그 선택은 영원히 한 가지 해답으로 존재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어를 짚는다면.

▲사랑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는 것이다. 사랑을 너무 흔한 말로 보는데, 이 먼지 같은 행성이 우주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행성이 됐을까와 같은 기적이 사랑이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지구는 사랑덩어리다. 사실 추리소설 기법으로 쓰긴 했으나 내가 봤을 땐 종교소설에 더 가깝다. 소설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경우 특히 신학교에서 교재로 많이 쓰고 있다. 기독교 계통의 독자들이 좀 더 활발하게 봐주길 바란다. 오늘날은 종교세상이라 부를 만큼 종교가 융성한데 하나님이 아닌, 물신주의가 팽배해 사람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진다. 종교가 이렇게 융성할 때도 없었지만 이렇게 타락할 때도 없었다.

-이 책의 대중성을 스스로 점수 매긴다면.

▲이 책이 나온 지 열흘 남짓 한데 일단 성공했다고 본다. 시골 계시는 지인들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들이 그리 수준 높은 독자는 아님에도 재미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걸 보니까 대중들이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구나 싶었다.

◇ 진보문학의 최전선 '실천문학'과의 동거


-실천문학사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데 그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이사직을 맡은 지는 10년 정도 됐다. 참 어려운 동네다. 80년대 문인들이 다 모여 십시일반으로 모여 만든 가장 진보적인 문학지가 '실천문학'이었다. 노동자·농민 출신 작가들 많이 배출했고, 민족문학 진영의 싸움들을 벌여 왔다. 처음에 송기원 선생이 월간 노동문학의 편집국장을 맡으라고 해서 실천문학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얼마 안가 실천문학이 편집 문제로 임원진이 구속당하고 쫄딱 망하게 됐다. 당시 나는 주간만 맡고 소설을 쓰려 했었는데, 급하게 구원투수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간 박완서 선생의 '아주 오래된 농담', 현기영 선생의 '지상에 오래된 숟가락 하나', 그리고 내 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등의 베스트셀러가 나오면서 실천문학이 그럭저럭 살아 왔다.

-소설가와 대표이사직을 함께 가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다.

▲글쟁이로서 갈등이 있다. 소설은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으로 집중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 말고. 저 새끼 뭐하나 그럴 정도로 추하게 싸돌아 다니면서 방황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소설가가 알을 품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사장으로서 실천문학 기획하고 작가들도 만나고 후배들 추스르고 이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정작 나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요즘은 강제적으로 한 달에 일주일씩 전화도 안 받고 스님들처럼 군다. 그러면 진도가 좀 나가지만 그것도 부족하다. 소설은 최인호씨도 언급했듯 그것만 하고 있어야 한다. 여유 시간에 잠깐 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 계속 하다가 아이디어 하나 떠오르면 그 실마리 잡고 꾸준히 들어가는 것. 진을 빼고 힘든 과정이다. 종종 심사위원으로 글을 읽다 보면 이렇게 힘들었겠지 하는 것들이 보일 정도다.

-실천문학의 나아갈 길에 대해.

▲실천문학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실천문학만큼 과거적인 것이 규정돼 있는 출판사도 없다. 그게 하나의 재산이기도 하다.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의 마지막 진영이라는 평까지 듣는다. 그 값을 해내야 한다. 변해가는 현실 속에서 방향을 차고 나가야 한다. 체 게바라나 스코트니어링 같은 삶의 철학 양식을 대안으로 제시해 주고 싶다. 자기 삶을 감동적으로 살아 낸 이현상, 김상 같은 분들의 책도 지금 곧 나온다. 그리고 생태주의의 새로운 방향들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이다. 실천문학은 지금 길 찾기다.

◇ 우리 '아픈' 출판가를 들여다 보다

-한국출판사의 당면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유통구조의 정도를 가야 한다. 시장 구조가 정상적인 구조로 회복돼야 한다. 너무나 과다경쟁으로 자기 살 파먹기로 가지 말고. 처음 '문화를 상품화 시켜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맞다' 무릎을 치며 그게 듣기 좋았다. 그러나 이제 문화를 너무 상품화하다 보니 문화 내부의 정신적 가치문제가 도외시 되고 출판시장이 돈 놀음이 됐다. 베스트셀러들을 들여다보면 하물며 한창 유행한 '아침형 인간' 관련 책들도 결국 인간의 가치적인 측면이 아닌, 어떻게 하면 아침부터 움직여 좀 더 돈을 벌수 있을까로 몰고 간다. 나는 인간의 삶이란 자기의 어떤 가치를 따라서 만들어가면서 사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고 본다. 우리사회야 말로 가장 철학이 필요하다. 마르크스가 혁명을 일으켰듯 근본적인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너희 집은 어떠냐'라고 했을 때,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등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몇 억 짜리야'라고 이야기하는 시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해 벽두부터 출판가 홍역은 이어졌다. 사재기, 대필, 대리번역, 표절, 삽화베끼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출판시장이 쓰레기통이 됐다. 잡다해져서 '끼워 팔기' 없으면 죽는다. 좋은 책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마케팅으로 승부한다. 대형 출판사들이 M&A 하면서 대형 마케팅을 주도한다. 오로지 마케팅으로 인해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좋은 책들 좋은 작가들은 냉소에 빠진다. 좋은 신인이 있어서 책을 하나 내도 표도 안 난다. 마케팅 시장 질서에 의해 '네임벨류'로서는 클 수가 없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건데 고기를 키우려면 물이 좋아야 한다. 좋은 문화풍토가 필요한데, 지금 우리 사회는 살기 싫을 정도다. 예전엔 기라성 같은 출판사에 기라성 같은 책이 나왔다.

-이번 마광수 교수의 표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작가들끼리 술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이런 일조차 또 뻔뻔스럽게 해프닝으로 지나가겠지. 그게 참 슬프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 뻔뻔함으로 가득 차있다. 존재의 품격을 지켜야 하는데, 내가 좀 잘못하면 어때라는 식이다. 자꾸 그렇게 욕 얻어먹는 것조차 상업적 가치로 쌓인다. '머니'로 쌓인다. 말레이시아에 아시안문학상을 세 번이나 받은 작가가 있다. 그런데 책을 팔지는 않는다.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가죽에 수제로 생산비를 받고 써준다. 이런 시장에 내 책을 던져놓는 것도 모욕적이다. 나도 많이 안 팔리더라도 직판매를 하고 싶을 정도다. 작가로서의 존엄성이나 자존심을 자꾸 훼손시킨다. 그렇게까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다. 마광수씨와 경쟁할 필요가 없지 않나. 김진명씨의 '나비야 청산가자'처럼 정치 소설 쓸 수도 있는데, 출판사가 너무 뻥튀기해서 경쟁상대로 올라와 있는 그런 경우도 싫다. 이문열씨는 자기 소신이니 싸워볼 만하다. 그런 경우는 논쟁으로 붙어보자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현황으로는 시장 외에 다른 구조가 있어야 될 것 같다.

-반면 지난해 공지영씨의 위력은 대단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경우 벌써 600쇄가 훌쩍 넘었던데.

▲난 지영이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생각할 만한 중심은 지키면서 씩씩하다. 이창호 같은 스타가 있으니 동네 바둑판이 성하듯 문학독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이야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영이처럼 70~80만부 찍는 책이 있으면, 1~2만부짜리 중간층 책들도 많아야 되는데 대개 1~2천부 팔려야 잘 팔린다. 중간층이 없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다.

◇ 젊은 작가를 위한 연가


-젊은 작가들 만나면 정말 생계 걱정을 절절히 한다. '투 잡'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 정도다. 작가로 살아남는 이들이 얼마 정도나 될까.

▲'딸깍발이'를 쓴 이희승씨가 한 말이 있다. 작가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건강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재능이라고. 조지 오웰 산문집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김수영씨 산문에도 보면 맨날 원고료 못 받은 이야기들이다. 그 당시에는 전체적으로 못살았다. 동가숙서가숙하다가 꽁치 하나 사가면 서로 위안이 되던 시절이다. 그러나 지금 작가는 전문가가 아니라 최고 밑바닥 인생의 낙오자다. 소설 자체를 포기하고 좌절하는 친구들도 절반이상이다. 한번이라도 자기 책을 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다. 정말 독자가 되어야 할 그들이 문학에 대한 대표적 냉소주의자가 된다.

-실천문학사는 지난 한해 젊은 작가들 책을 얼마 정도 내줬나.

▲지난 한해 문예진흥원 복권기금 사업에서는 신인들 책을 가장 많이 낸 출판사로 꼽혔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게 딜레마다. 문학출판사 이름 걸어놓고도 아동물로 푸는 실정이다. 일반소설 2천부, 시집 1천부 등 권당 이렇게 팔아서는 견딜 수가 없다. 좋은 작가들도 위축된다. 문예출판사들이 다 어렵지만 감수를 해줘야 한다. 사실 문학동네가 최근 욕을 먹긴 했지만 지금까지 잘해 줬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다. 독자들에게 누가 강요할 수 있나. 가수도 영화배우도 뜨면 스타가 되는데, 한 스타를 위해 90% 정도는 죽는다. 재능 없는 사람도 운이 좋으면 살아남고 재주가 나보다 나아도 빛을 못 볼 수도 있다.

-젊은 작가들에게 주고픈 말이 있다면.

▲젊은 시절엔 감각으로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상과 생각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작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이것도 하나 해볼까와 같은 소재주의나 역사물로 흐른다. 좋은 작가는 평생 수도자처럼 자기 주제를 계속 따라가면서 쓰는 이다. 글을 써보면 세상에 대해서도 도가 통하고 사람들과도 도가 통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들이 스님들과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같은 족속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참 단명한다. 왜냐하면 유행을 타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일관된 주제를 갖고 그 주제의 연속성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면서. 그리고 옛날 혁명기나 격동기 때처럼 계속 굴곡을 만들어 내는 경험적인 삶이 작가를 받쳐줄 때 '닥터 지바고' 같은 책도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삶 자체가 거의 비슷하다. 이는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든 해쳐 나가야 할 숙제다. 나 또한 올해부터 그런 문제들을 회피하지 말고 단편으로 써 나갈 생각이다. 힘들어서 안쳐다보려 했는데 이제는 소설로도 많이 쓰려 한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은 해야 되지 않겠나.

◇ 그래도 문학이 희망이다

-문학의 역할론을 짚는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 이후 좋아졌다 이야기하지만 모순은 더 깊어지고 사람들의 삶은 더 황폐해졌다. 신자본주의 물결 때문에 빈부격차가 너무 극심해 아래층의 삶은 굉장히 각박하게 몰려간다. 문학 밖에 없다. 정치도 못해주고. 그런데 준엄하게 질문하고 답해야 할 문학이 그 역할을 잘 못해주고 있다. 엔터테인먼트로 실험적 오락적 형태로 너무 가버렸다. 요즘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게 일본 소설이다.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힘들게 독자시장에서 싸워나가고 있지만, 그것이 바뀌어 지지 않으면 힘들다. 문학은 민족정신의 혼이다. 겉으로는 한류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정신이 잠식당하고 있다. 우리 윗세대들은 전쟁문학으로 먹고 살았다. 별걸 다 경험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넘어왔는데 이들은 굉장히 실험적이고 포스트모던하다. 중간세대가 없다. 인문적 전통을 할 수 있는 세대가 비어 있다. 그래도 구효서 같은 작가가 열심히 쓰고 있다.

-특히 실천문학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듯싶은데.

▲ 문학은 자기 당대의 삶을 기록해 내는 것이다. 최선의 구도적인 면에서부터 가장 엔터테인먼트 부분까지. 초기 문학은 하나의 원동력에 봉사하는 혁명적 도구로서 자기 당대의 억압적 구조와 싸워나가는 역할을 했었다. 작가들이 가장 감옥에 많이 갔다. 그만큼 가장 전위적인 위치에서 양심을 지켜내고 조세희씨처럼 당대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글로 공감케 하고 재인식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그건 문학이 절대 포기해선 안 될 부분이다. 오늘날 삶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 졌다. 그걸 다 담아낼 수는 없지 않나. 문학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건 좋다고 본다. 작가가 자기 색깔대로 노래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중심은 지켜야 한다. 리얼리즘이 있고서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

90년대 넘어오면서 해체주의가 들어오고 이어 유목주의라 불리는 노마디즘(nomadism)이 잠식했다. 이전 시대가 'C:' 도스 체제였다면 지금은 윈도우 체제다. 도스 시대에는 현상에 대한 역추적이 가능했지만 윈도우 시대에는 자기 관심들끼리 뽀글뽀글 모여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디렉토리끼리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 행동이 가치있는 것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사회전체가 허무주의적 냉소와 무관심에 지쳐가고 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뤄졌는데, 말 그대로 사막에 내던져 졌는데, 그게 어떻게 자유인가. 뭔가 루카치가 말하는 혁명의 별 혹은 북극성이 보이고 길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는 별도 없이 사막에 내던져 졌다. 개인이 개인의 행위를 책임져야 한다. 처음에는 신났다, 워낙 80년대 깃발 아래서 집단주의의 융성에 환멸을 느끼다 보니까. 그러나 이렇게 개별화되면서 오래가다보니까 내가 사는 게 뭔가 옆으로 기우뚱 하게 된다.

지금 내게도 이게 가장 큰 주제다. 인류가 진화하고 있다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가. 진보적 철학에서도 인류가 지금 진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공허해지는 일들이 도처에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 사건처럼 일종의 21세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부디 안녕하길.

/사진=이상운 기자 photo98@pc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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