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서울서 막 돌아온 어느 날 오후였다. 며칠간 집을 비운 후, 다시 돌아오면 나는 금방 집 안으로 들어가질 못한다. 큰 호흡도 몇 번 하고 (마치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사람처럼) 잔디와 주목, 감나무와 모과나무, 사철나무와 단풍을 둘러보아야 하고 뽕나무 아래의 평상에도 앉아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뒷마당으로 돌아간다. 하트 모양으로 줄지어 선 무궁화도 보아야 하지만 궁금한 놈들이 있다. 혹시 꼬맹이들이 와 있나? 살펴본다. 꼬맹이들이란 길고양이들을 말한다.

이 길고양이들에게 ‘펫’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손끝? (고양이니까 털끝이라고 할까?) 하나도 건드릴 수 없게 하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먹이를 얻어먹는 처지인데도 내가 가까이 가면 쏜살같이 도망쳤다가 안 보이면 먹으러 나온다. 제일 가까웠을 때가 1미터 정도이다. 이놈들이 안 보이면 왠지 서운하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집에 없을 때도 있는데 이놈들의 식사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는 법이다. 즉 우리는 서로를 1미터 정도 멀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나타나다가 한참동안 안 보이는 놈이 생기기도 한다. 서너 마리가 주로 우리 집 손님이자 주민(?)인 셈인데, 그 중 한 마리가 안 보이면 걱정이 된다. 혹시 로드킬의 피해자일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덫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주변 산에서 오소리나 여우, 멧돼지까지도 나타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농부들이 피해를 막기 위해 덫을 설치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좀 못된 어른이 (시골엔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 해코지하려고 고양이를 맘먹고 잡을 수도 있다. 그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가끔씩 꼬리가 반쯤, 또는 몽땅 잘려져 나간 고양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나를,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족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일 게다. 그 가해자도 음식을 주면서 고양이들을 유혹했을지 모르니까. 나는 잠자코 우리 꼬맹이들의 의심을 받아들인다. 나 또한 그놈들과 깊이는 사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눈에 잘 보이는 애타는 그 눈동자며, 관심을 받으려는 울음소리 등에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다. 그놈들은 아침에 뭘 먹었다고 해서 만족해서 어디로 가버리고 다음날은 오지 않는 놈들이 아닌 것이다. 점심때 꽤 많은 양의 음식을 제공했는데 다 먹고 저녁때면 또 어슬렁거리고 있다. 물론 또 주면 먹을 태세다. 처음엔 내가 황당하기도 했다. 낮에 –고등어 정식-을 먹고 남긴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주었는데 저녁 소고기를 다듬다가 우리가 안 먹는 기름이 생겼다. 이때, 내가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했다. 이건 저녁에 주지 말고 아꼈다가 내일 줘야지, 하는 생각 말이다. 드디어 내가 꼬맹이들을 길들이게 된 것이다.

‘길들이기’란 참으로 중요한 명제이다.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고양이한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가을이 끝나고 모든 잎이 떨어져 겨울을 맞이할 때 나무들을 정리해 준다. 이때면 서울서 내려와 내게 나무에 관한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주는 나무 박사님이 한 얘기는 ‘하고 싶은 대로’ 나무 전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어떤 모양으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물론 전정이란 시기도 중요하고 기본 틀도 중요하겠지. 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전정가위를 들고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그냥 썩둑썩둑 자른다. 자르고 나서 다음해에 나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알게 됐다.
 
고양이들은 앞마당에서 어슬렁거리면 안 된다. 뒷마당에서만 논다. 밥그릇도 뒷마당에 있다. 더욱이 앞마당 잔디 넓은 곳에서 배설하면 안 된다. 그럴 때, 나는 작대기를 들고 쫓아간다. 어느 정도의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나는 눈으로 놈들을 즐긴다. 눈이 똥그래서 예쁜 놈, 흰색 털이 예쁜 놈, 먹을 게 생기면 친구들을 불러오는 착한 놈, 이렇게 예쁜 놈들 천지다. 가끔씩 하루 두 번씩 줄 때도 있지만 한 번 식사로 만족하라고 그놈들을 길들인다. 무엇보다 채소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내게 그만큼만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이럴 때, 사람 팔자를 생각해본다. 자기 식사를 손수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하고 또 일한다. 누가 공짜로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쫓아다니다 보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포기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사실 고양이도 쥐를 잡아먹으면서 살도록 운명 지워졌다. 하지만 좀 더 쉬운 방법에 기생하다보면 인간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된다.
 
시골이란 가까이에 식물이랑 동물과 함께 하는 환경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에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귀촌한지 만 3년이 넘는 동안에 평소에 갖고 싶던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심은 놈들 중 3분의 1 정도는 죽은 것 같다. 나무가 죽어 가면 안타깝고 불쌍한 생각에 가슴 아프다. 그래서 좋다는 막걸리도 부어보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스스로를 ‘길들인다’. 아! 이 나무는 우리 집 토양에 안 맞는 모양이구나.

아무튼 사람 팔자는 아무리 못 해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먹이를 구하는 고양이들보다는 나을게 틀림없다. 물론 안쓰럽게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 나무 팔자보다 좋은 것은 말할 것 없고.

어떻게 이렇게 겸허해질 수 있는지, 시골에 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보기나 했겠나? 생각하며 나 자신에 그만 웃음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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