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올들어 신조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긴 말을 최대한 짧고 간단하게 줄여 쓰다 보니 무슨 뜻인지 몰라 소통이 안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촌철살인으로 세태를 정확하고 간명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애정이 가기도 한다. 

 올해는 유독 무주택자와 관련된 자조 섞인 신조어가 많았다, 수년간 지속적으로 폭등해온 집값 때문에 좌절감에 빠진 무주택자가 겪는 우울증이 많아지면서 ‘부동산 블루’라는 단어가 보편화됐다. 요즘엔 '벼락거지'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야 했는데 꾸준히 저축을 하면 언젠가는 집을 살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값이 폭등해 사실상 거지로 전락했다거나, 시세차익을 노리고 재빠르게 집을 판 뒤 전셋집으로 이사했다가 한 순간에 전월세 난민이 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급증한 월세를 내기위해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사람을 ‘렌트 푸어'라 일컫고 높은 가점과 경쟁률 탓에 주택청약을 단념한 청약 포기족을 ’청포족’이라고 부른다. 뒤늦게나마 ‘벼락거지’ 신세를 탈피하기 위해 투기 대열에 동승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영끌’(집을 사려고 영혼까지 끌어 모은다), ‘패닉 바잉’(공황 상태에서의 구매)‘, ‘빚투’(집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빚까지 내 투자하는 현상)를 비롯해 ‘청약은 무슨, 피(프리미엄)를 주고 사라’는 ‘청무피사’라는 신조어가 올해의 부동산 풍조를 대표하는 일상어가 됐다.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다 보니 매도인이 계약금의 두 배를 물어주고 계약을 파기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래서 배액 배상과 재테크를 합친 ‘배배테크’라는 신조어가 생겼는가 하면 중도금을 치른 시점부터 매도인의 일방적인 해약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착안, 약정한 날짜보다 빨리 중도금을 매도인 계좌에 입금하는 ‘강제 중도금’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 뿐이 아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난과 관련, “아파트가 빵이라면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한 말이 ‘씨’가 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던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에 빗대 ‘빵투아네트’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정부가 전세대책으로 내놓은 호텔 전셋집을 풍자한 ‘호텔 거지’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지금까지 무려 24회나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 대책을 내놓으면  집값이 잠시 주춤하다 얼마 후 다시 되오르는 상황이 반복되자 정부의 대책 발표도 이처럼 많아졌다. 대책이 나올 때 마다 어김없이 관련 세법과 대출 규정이 개정됐다. 하도 바뀌다 보니 전문가인 세무사나 은행원들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개정된 세법과 대출 규정 등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이들과 고객 간의 손해 분쟁이 봇물을 이뤘다. 그러자 양도소득세 업무를 아예 취급하지 않는 세무사와 복잡한 주택담보대출 상담을 포기한 은행원이 대거 등장하면서 ‘양포세’와 ‘주포원’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세종시 관가에선 서울과 세종시에 각각 집 한 채씩을 가진 이른바 ‘서세원’ 과장과 국장이 선망의 대상이다. 세종시 부동산 값은 지난 7월 ‘행정수도 이전론’이 나오면서 더욱 가파르게 올랐다. “세종시 땅값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지난달 초, 다주택자이던 여성가족부 차관이 포기한 세종시 아파트 분양권 추가 분양에 무려 25만 명이 몰렸다. 이 아파트는 전용면적이 99㎡(30평)로 2017년 12월 당시 분양가가 4억6000만원에 불과했다. 최근 같은 평형의 인근 아파트 실거래가는 14억원에 달한다. 내년 6월 입주 때면 시세 차익이 10억원을 훨씬 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벼락거지들이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가진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대출을 받는 길마저 막혀 있으니 자연히 눈을 돌리게 되는 곳이 소액투자가 가능한 주식과 암호화폐 시장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엔 주로 안전자산에 투자한다. 하지만 이판사판이라는 심리가 조성되면 ‘못 먹어도 고(Go)’ 라면서 리스크가 큰 위험자산 투자에 뛰어든다.   

 투기열풍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한국경제의 미래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부의 효과'를 가져와 성장을 촉진시키는 선순환 효과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자산 가치와 실물 경제의 괴리가 너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산가격 버블은 필연적으로 붕괴돼 위기를 초래한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자산가치의 급락은 소비 경련을 일으켜 경제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과잉 상승장보다 훨씬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정직하게 일하면서 한푼 두푼 저축해 나가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가 불안해진다. 특히 청년은 나라의 미래다. 이런 청년들에게 투기에 목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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