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바람이 분다. 몸이 날아갈 정도로 세차게 분다. 겨울바람은 아니되 아직 봄바람도 아니다. 바람은 동네 이곳저곳에 아직도 걸려 있는 현수막을 날리면서 내 온몸을 싸늘한 기운으로 할퀸다.
 
‘아범아! 며늘아! 이번 설 명절엔 안와도 된다. 대신 현금만 보내라.’
‘얘들아, 이번 설 명절 차례는 우리가 알아서 지내마. 마음만 보내라.’
‘이번 설, 만남보다는 마음으로 함께 해 주세요.’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우리 설날은 내년이래요.’
 
시내를 다니다보면 별별 내용의 현수막이 마음을 휑하게 만든다. 작년 추석에는 그 내용들을 보고 당황했었지만 이젠 더 이상 별 일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사회를 좀먹으니 황당하다. 눈에는 안 보이더라도 바람처럼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렇게 두렵지 않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느낌도 없고 감촉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아야 바이러스가 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마스크로부터 시작해서 오로지 꽁꽁 싸맬 뿐, 다른 방법이 없다.
 
과학이 바이러스를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 현미경을 발명했고 그것으로 해서 바이러스를 관찰했고 드디어 백신도 만들었다고 한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힘에 눌려서 결국 소멸할 지경으로 가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병 발발의 모든 원인은 다 잊어버리고 이 병을 고쳐준 과학에만 의존하게 될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바이러스가 왜 생겼는지를 쉽게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다. 자연의 있을 자리를 우리 인간이 많은 부분 침해해서 생긴 바이러스가 아니던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 명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날 선 바람이 회초리처럼 울었다. 어제, 오늘. 지역마다 다를 테지만 바람이
–이제 겨울은 가는 거라고, 봄이 오는 거라고,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자연은 제 날짜를 지켜 봄을 준비시키고 있다고- 말하면서 날카롭게 울고 있었다.
-왜 울죠?- 내가 물었다.
-땅 밑에서는 녹아서 흐르느라 물이 바쁘고 땅 위에서는 내가 바쁘답니다.-
바람이 울면서 말했다.
-나무들에게 싹을 틔울 준비를 시키느라고 달려가야만 하죠, 농부들에게도 알려야 하니 바쁠 수밖에요. 사람들에게도 이제 앞으로의 봄은 다를 거라고 말해 줘야 해요.-
-어떻게 다를까요?-
-그건 사람들 마음이 달라진 만큼이죠. 하여간 앞으로의 봄도, 여름도, 모두 달라질 겁니다.-
 
그 말을 하고는 바람이 쌩하고 달려갔다. 나도 그 뒤를 쫓아 달리다시피 걸어 동림원으로 갔다. 남편과 내가 조성하고 있는 과일나무 정원 속의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꿋꿋하게 똑바로 서 있었다. 작년 늦여름 태풍 속에서 모두들 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렇다. 이른 봄의 바람은 맵고 날카롭기는 했지만 태풍 속의 바람과 같은 속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과수들의 재고 정리를 했다. 작년에 심은 과수가 분과 묘목 합쳐 총 262주, 고사목 수량은 80주로 현재 남아있는 총수는 182주라고 나무 심어준 분들은 말했지만 내가 일일이 확인한 바로는 살아있는 나무는 150주 정도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죽었네 하고 안타까웠지만 하나하나 조사해 보니 의외에도 씩씩하게 살아있는 나무들이 보여 대견했다. 작년 봄의 때 이른 한파, 여름의 엄청난 폭우와 길었던 장마 속에서 배나무는 10주 심은 중에 9주나 살아남았다. 영천 지역엔 배가 별로 보이질 않는데 웬일일까? 우리 토양에 맞는 걸까? 잘 자라줄까? 특히 3년생 분으로 심은 배나무는 줄기에서 윤기까지 흘렀다. 가지들은 굵고 튼튼해 보였고 몇 개는 서로 얽혀 전정이 필요해 보였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불어 땅에 발을 대고 있기만 해도 힘드니 포근한 날에 해야 하겠지만.
내가 전정을 하겠다고 나서다니? 정말로?
 
며칠 전, 동림원을 돌봐 주겠다고 나선 이웃 마을 선생님이 내게 곧 전문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열정이면 2-3년 안으로 과일 전문가가 되실 걸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복숭아 전문가이다. 우리 동림원의 복숭아밭을 맡아 주시겠다고 했다. 한 나무에서 세 종류의 복숭아가 열리게 해 주겠다고도 장담한 분이다. 우리는 그 복숭아 동산에 팻말을 세워 그 분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으로 보답할 작정이다. 포도 또한 남편의 친구분인 포도 박사가 담당인데 그 분 역시 포도에 각각 색깔이 다른 세 종류의 포도가 열리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체리 담당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남편이 체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도 좋아한다. 15주 중 8그루의 체리나무가 살아남았는데 과일이 열리면 우리가 다 따 먹을 생각이다. 하하.
 
장마 피해가 제일 많았던 것은 앵두와 키위이다. 정자 주변으로 키위와 다래 넝쿨을 올리고 싶었는데 10개의 묘목이 전멸했고 앵두 10분 역시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장마 때, 거의 한강같이 물이 고여 있던 그 지점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래서 배수를 전반적으로 손보기로 했다. 유공관을 두 층으로 해서 부직포로 싸야 한다고 한다. 자갈과 모래도 필요하고. 그 공사를 하기 전에 퇴비를 20차 정도는 뿌려야 한다고 한다. 퇴비는 한 차에 20만원이란다. 그 후에 죽은 나무를 보식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바람이 오늘처럼 심하게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 며칠 전처럼 포근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좋은 점도 있다. 집안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나도 흔들리며 밖의 흔들리는 사물을 보는 일이다. 거실의 통창 밖에서 모든 사물이 흔들린다. 마을회관 위의 태극기가 흔들리고 동네의 감나무들이 흔들린다. 매실나무 위에 걸린 하얀 비닐 쪼가리도 흔들린다.
 
봄이 다가오는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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