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지난 달 26일은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흐린 밤하늘 가운데서 달을 찾다가 나는 깜빡 코로나 시대인 걸 잊어버리고 그리운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예년처럼 대보름모임을 하시나요?”
그러자 그이가 현실을 일깨워줬다.
“지금 같은 시국에선 아무도 못 모이죠. 저도 정말 안타까워요.”

이 곳 영천으로 이사 오기 전 한 때 전라도에서 살았다. 그 곳 나주에서 정월 대보름 모임에 초대받았다.

주인장은 개인 정원을 혼자 만든 것으로 칭송받는 화가. 음악과 이야기가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어우러지던 모임이었다. 사모님이 오색 나물과 잡곡밥을 준비해 주었고 많은 참석자들이 저마다 가져온 후식으로 식탁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있는 이 모임에서 모두들 한 가지씩 장끼 자랑도 했고 노래 부르는 이가 잠깐 까먹은 노래의 뒷부분을 모두 합창처럼 큰소리로 부르곤 했다. 주최하는 사람이 예술가인 덕분인가, 모두 예술가가 된 듯 고양된 기분이었다.

내가 시골에 살게 된다면 한 번 주최해보고 싶은 내용의 모임이어서 그런지 관심은 많았지만 왜 그이가 정월 대보름이라는 날을 골랐는지는 그 당시는 몰랐다.
 
시골에 오게 되자 그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정월 대보름이야말로 농사 일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곳 영천의 용전마을도 그날 동네 초입에 있는 당산나무 밑에서 작은 동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예년엔 한 밤중 자정에 했지만 올해는 밤 10시로 당겼다고 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마을 대표 네 명이서만.
 
대보름이 지나고 곧 날이 풀렸다. 아직 꽃샘추위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봄날이 된 것이다.

경칩인 오늘, 나는 채소 씨를 뿌리기 위해 고랑을 만들었다. 고랑? 이제 나도 네 번째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제는 새내기가 아니다. 처음에는 잔디밭 위에 그냥 씨를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씨가 발아할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 후엔 잔디밭이 아닌 맨 땅을 조금 파고 씨를 뿌릴 줄 알게 됐다. 다시 새 봄이 되었을 때 나는 호미로나마 땅을 조금 골라주고 나서 씨를 뿌렸다. 그리고서도 당근이나 고구마나 감자가 그 굳은 땅을 뚫고 뿌리를 살찌울 것으로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올해 나는 땅을 고를 때 삽을 쓸 생각을 했다. 삽이라니? 삽이라면 나에게 공포영화에서 살인자가 범행을 숨기려고 할 때 삽으로 땅을 파고....라거나 죽이려는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고 총살형을 집행 한다거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먼저 나는 것이다. 생산적인 수단으로 삽을 쓴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런데 지난주일 우리가 묘목시장에서 사온 나무들을 가식할 때 형님이 땅을 삽으로 푹푹 파서 심는 것을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윗동서이다.

“삽질, 그거 힘들지 않아요?” 했더니 “뭐, 쉬워.” 하면서 시범을 보인다. 삽을 땅에 갖다 대고 오른 발로, 또는 왼 발로 삽의 윗부분을 꾹 누르면서 힘을 준다는 것이다.

그 날은 보기만 했지만 씨앗 뿌릴 두둑을 만들 계획을 하면서 삽을 써 보기로 했다.
삽질? 드디어 그것을 해 보는 기회가 왔다. 남편이 친구 만난다고 외출을 한 사이를 틈타 혼자서 말이다. 내가 삽질을 한다고 하면 남편이 분명 먼저 나서서 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50평 가까이 되는 텃밭은 역사가 길다. 처음에는 진흙 밭인지 몰랐다. 아주버님이 말하던 ‘쪼대’(경상도 방언으로 점토) 흙인 거다. 마사토 한 차, 퇴비 한 차, 이렇게 50만원 가까운 비용을 쓰고서야 텃밭다운 텃밭으로 변했다. 그 땐 와! 비싸다. 생각했는데 그 값이 지금 와서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 이제 이 텃밭은 50킬로의 체중을 가진 70대 여자가 혼자서 주무를 수 있는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삽질이 잘 된다. 그 전의 쪼대 흙이었다면 씨도 안 먹혔을 것이다. 형님이 하듯이 삽질을 푹푹 해서 흙을 뒤집었다. 조그만 잡초 같은 것은 통째로 뒤집힌다. 그렇게 두둑을 다섯 개 만들어 놓았다.

다음엔 물길을 내기 위해 다시 삽질을 했다. 삽질로 생긴 흙은 텃밭 가장자리에 죽 펼쳐 놓았다. 퇴비와 함께 섞을 예정이다. 작년 그 자리에 옥수수를 심었는데 늦게 파종하기도 했지만 영양이 없었는지 한 자루도 수확하지 못했다. 아직 옥수수를 심을 시기는 안 되었지만 요새 유행인 초당옥수수 씨앗을 먼저 사놓았다. 다른 씨앗은 보통 2000원 정도인데 이 옥수수 씨앗은 5000원인데다가 100알갱이 밖에 들어있지 않다. 겉 포장지에 100립이라고 씌어 있다.

만들어 놓은 두둑에 로메인 상추, 루콜라, 셀러리, 치커리 네 가지를 먼저 심었다. 어서 자라서 우리 집 아침 식사가 되어 주렴.

케일과 고수는 4월이나 되어야 파종할 수 있단다. 당근도 감자도 고구마도 땅콩도.... 심을 작물이 줄을 섰다.

오늘 삽질에 재미를 붙였다. 작년엔 왜 호미만 가지고 일했는가 싶다. 내일 시간 있는 대로 두 번째 줄의 고랑을 만들기 위해 삽질을 해야겠다. 내가 삽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집에 온 남편은 내가 분명 내일 근육통으로 쓰러질 거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삽질한 후의 흙을 장갑 낀 두 손으로 주무르던 그 생생한 촉감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밀가루같이 부드러웠다. 물론 삽질한 후에 뒤집힌 흙을 고르면서 큰 돌 작은 돌을 말끔히 골라낸 후였기 때문이었겠지만.
 
정월 대보름 전야의 아름다운 모임을 기획했던 화가는 화가이기 전에 농부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 댁의 수많은 나무들과 꽃을 모두 직접 심었다니 정월 대보름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삽으로 땅을 파서 식물을 심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누구에게도 특별히 말 안했을 것인데 오늘 나 혼자 삽의 용도를 밝히며 신기해한다.

세상이 다 알고 있었더라도 내가 오늘 발견하면 그건 나에게 ‘신대륙의 발견’이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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