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산과 不可分...코로나 블루에 妙藥 됐으면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한가위 추석(秋夕)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가장 풍성한 때인 데다 날씨마저 좋은 시기여서 말 그대로 ‘중추가절(仲秋佳節)’이다.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인한 정부의 귀성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올 추석도 예외 없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하기만 하다.

한국교통연구원의 ‘추석 연휴 통행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번 추석연휴 기간 동안 모두 3226만명이 이동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추석(3116만명)과 비교하면 110만명(3.5%) 늘어난 수준이다.

닷새 동안의 황금연휴 기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여가생활은 뭘까. 아무래도 등산일 것이다.

몇 년 전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전국의 만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취미·문화’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14%가 등산을 가장 좋아하는 취미라고 답했다, 이어 음악감상(6%), 운동·헬스(5%), 게임(5%), 영화관람(4%) 등의 순이었다. 조사를 시작한 지난 1997년 이후 등산이 으뜸 자리를 뺏긴 적이 없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월 1회 이상 등산하는 사람은 남성의 37%, 여성의 19% 등 성인 넷에 한 명꼴(28%)로 나타났다. 50대 이상 남성의 절반이 여기 해당하지만 20대 남성의 34%, 30대 여성 21% 등 젊은층도 적지 않았다.

등산은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서 시작하지만, 산은 건강 외에도 많은 것을 선사한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자아성찰 하는데 등산보다 좋은 게 없다. 산을 오르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으로, 자신과 대화할 시간을 준다. 자기와의 시간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된다. 부질없는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긴다. 타인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열린 마음도 생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도심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별다른 장비가 필요 없어 비용이 적게 들 뿐 아니라, 연습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 인원에 상관없고, 동반자가 없어도 된다. 언제라도 배낭만 챙겨 체력에 맞게 걸으면 된다. 경쟁하지 않아서 마음도 편하다. 이보다 경제적이고 좋은 운동이 어디 있을까.

친구와 친해지기도 좋다. 함께 산행하면서 오붓하게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간 몰랐던 친구의 근황도 알게 된다. 평상시 못한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어, 묵었던 감정이나 오해가 쉽게 풀리고 친구를 이해하게 된다. 청량한 산의 공기는 머리를 맑게 해줘 많은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한다. 일상에서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고민하던 것들이 술술 풀리기도 한다. 정신 건강에는 더할 나위 없다. 산행 후 성취감은 커지고, 자신감은 충만해진다.

산에 오를 때는 인내와 끈기를 체득하며, 내려올 때는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무엇보다 자연과 함께해서 좋다.

오늘날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처절하게 생존에 시달리면서도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한국에 산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칼럼니스트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의 이야기)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블루(blue, 우울감)’시대엔 확 트인 공간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땀을 흘리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산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코로나 펜데믹으로 등산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국립공원관리공단 관계자의 얘기다.

한국은 산지 면적이 전체 국토 면적의 63%나 된다. 특히 서울은 북한산, 도봉산 국립공원을 비롯 관악산, 청계산, 수락산, 불암산, 검단산 등 수려한 명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하철로 1시간 남짓이면 산행을 할 수 있으니 서울시민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등산 천국’의 지리를 갖추었다. 이는 천혜의 축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산을 좋아할까? 이에 대한 관련 전문적인 조사나 연구자료는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분석해보았다.

첫째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단군 신화도 산(태백산 또는 묘향산)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모태(母胎)가 산이라는 얘기다.

또 내로라 하는 산에는 성(城)이 있다. 국가의 근거지가 산이라는 말이다. 산을 방패삼아 적의 침입을 막았고, 산을 요새 삼아 자국민의 안정을 지킨 것이다.

둘째, 종교적으로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가 불교다. 사찰 대부분이 산중에 위치해 사람들이 절로 가려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산행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된다.

셋째, 지리적 특성이다. 우리 국토의 3분의 2 가량이 산으로 구성돼 있다. 실제 사람이 살 수 있는 평지도 불과 5%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운동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산인 것이다.

넷째, 정신적인 측면이다. 산을 자주 찾는 사람은 산에 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건강에 이로운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지구상에는 해발 8000m가 넘는 거봉(巨峯)이 14개 있다. 그 거봉 모두를 오르기란 곧 목숨을 건 모험과 엄청난 고난의 무수한 반복을 의미한다.

1986년 ‘세기의 철인’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최초로 이 위업을 이룬 이래 많은 명등반가들이 ‘8000m 14좌 등정 레이스’에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하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7월 '열 손가락이 없는' 산악인 김홍빈(57)씨가 세계에서 12번째로 높은 8천 47m의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 장애인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m급 자이언트봉 14개를 모두 밟았다. 앞서 2009년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이은 쾌거다.

안타깝게도 하산 도중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었으나 인간 한계에 맞서는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 개척정신은 두고두고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것이다.

이 극도로 어려운 거봉(巨峯) 등정을 한국은 엄홍길, 박영석(2011년 실종)에 이은 한왕용의 성취로 이미 2003년 14좌 완등자를 3명이나 배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특히 ‘끝없는 도전’의 저자 박영석은 2005년 5월 1일 북극점 도달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7대륙 최고봉, 히말라야 14좌, 지구의 3극점)을 달성했다.

고상돈이 1977년 9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8,848m) 정상에 우뚝 선 이후 허영호, 오은선(세계최초 여성 14좌 완등) 김창호(14좌 무산소 완등) 등 우리나라는 숱한 세계적 알피니스트를 배출했다.

이같은 ‘등산강국’의 이미지는 암벽등반(스포츠클라이밍) 분야에도 이어져 ‘클라이밍의 여제’ 김자인을 낳았고, 천종원 사솔 서채현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한국은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고작 1950m(한라산)이고 고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이른바 알피니즘(Alpinism, 험준한 산을 오르는 행위)이 도입된 지는 80여년, 히말라야 원정 등반의 역사는 130년이 넘는 유럽 국가들에 비해 50년쯤에 불과하다. 이런 한국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록을 낼 수 있멌을까?

전문가들은 북한산 인수봉(仁壽峰, 810m)의 덕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1000만 인구의 대도시 안에,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 만에 찾아갈 수 있는 200m 높이의 대암봉(大岩峰)을 2개나 가진 나라는 아마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여 가면 닿을 수 있는 산들이 서울 근교에 진을 치고 있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900년대 중반, 서구의 알피니즘(Alpinism)을 통해 유입됐다. 정상 정복의 성취 욕구를 중심에 둔 등산의 이념과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급적 더 높은 산을, 가급적 더 단시간에 오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이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국인의 등산 열풍에 대한 서구 언론의 분석을 보자.

‘월스트리트저널’은 2015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녹초가 된 한국인이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 등산”이라고 썼다.

‘워싱턴포스트’는 ‘달걀판처럼 산이 많은 나라인데다 부유해지고 여가 시간이 늘어서’라고 풀이했다. ‘뉴욕타임스’의 백두대간 등정기에서는 “미국인에게 서부가 있다면 한국인에겐 산이 있다”라고 적었다. 미국 공영방송 ‘엔피아르(NPR)’는 로스앤젤레스의 등산로를 가득 메운 이민 2세, 3세 재미 한국인을 취재하고 “등산은 한국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라고 단언했다.

등산은 우리의 문화 DNA에 깊이 각인(刻印)돼 있을지 모른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선비들은 명산(名山)을 오르고 그 기록을 남겼다. 유산기(遊山記)다.

수년 전 한 학술대회에서 ‘조선 선비의 유산(遊山) 문화’를 주제 발표한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산수 유람을 중요한 공부 수단으로 생각했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유산이 오늘날의 등산이나 여행과는 이질감도 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했다. 오늘날 산행문화의 뿌리로 보이는 부분도 상당하다는 것..
조선 시대 등산기인 ‘유산기’는 약 600편에 이른다. 사대부들의 등산은 주로 북한산, 금강산, 지리산, 소백산, 가야산, 청량산, 백두산 등에서 짧으면 2~3일, 길면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이뤄졌다.

조선 선비도 절경을 즐기러 산에 갔지만 산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심신을 수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요즘과 달랐음은 유산기를 남긴 선비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킨 데서도 알 수 있다.

산행 열풍은 단군신화, 유산기, 산신제(山神祭) 등 한민족과 산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풍철인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높은 곳에 올라서 하루를 즐기던 세시풍속(歲時風俗) ‘등고(登高)’도 같은 맥락이다.

한민족에는 ‘산천 DNA’가 있다는 것이 관련 학자의 진단이다.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는 금강산을 찾고 싶은 열망을 천재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사망일 미상)로 하여금 직접 그려오게 해서 곁에 두고 즐겨 감상했다.

또 당시 제주도에 최악의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자 전 재산을 풀어 500석의 쌀을 구입, 1천여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의녀(義女) 김만덕’도 그 공덕에 대한 보상으로 “소원을 들어주겠으니 말하라“는 조정의 배려에 ‘금강산 구경’이라고 답해 꿈을 이뤘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백미(白眉)로 불리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는 최고의 진경산수화(眞境山水畵)로 평가받는 걸작. 여름 장마철, 경복궁 서쪽 인왕산(338m)의 비 온 후 막 갠 풍광을 그린 이 그림은 우리 문예사의 신기원을 이룬 작품으로 겸재의 지극한 산 사랑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평생지기(平生知己)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쾌유를 비는 절절한 우정이 녹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담긴 기마민족의 개척정신, 도전정신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영국의 세계적인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오렐 스타인(Mark Aurel Stein)이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도 위대한 업적”이라고 찬탄한 고선지(高仙芝, ?~755) 장군의 파미르 원정!

고구려 유민(遺民)의 후예로 당나라 장수가 되어 8세기 중엽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해발 평균 고도 6100m, 텐산 티베트고원 히말라야 힌두쿠시산맥 까지 총칭)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준한 고봉들을 넘나들며 이슬람에선 ’중국산맥의 호랑이‘, 중국에선 ’서역 수호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역 대원정의 루트는 장장 1만km.

비슷한 시기 당나라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서 천축(天竺, 인도)으로 구법(求法)여행을 떠난 신라 승려 혜초(慧超, 704~787)의 귀환길 이동거리는 총 1만5천여km. 그 역시 눈덮인 파미르고원,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 천산산맥 등을 넘으며 모두 40여개 나라를 통과했다.

7세기 중반 연개소문 집권 시절, 고구려는 당나라 후방인 소그드 왕국(우즈베크)과 동맹을 맺기 위해 외교사절을 평양에서 5000km나 떨어진 사마르칸트까지 보냈다. 티무르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 소재한 아프라시아브(옛 지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신도‘ 벽화에 조우관(鳥羽冠)을 쓴 두 명의 고구려 사신이 묘사돼 있다. 돈황석굴(敦煌石窟) 벽화에도 같은 모습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때 한민족의 여행길은 이미 1300~1400년 전에 실로 장대했다.

아무튼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행위는 아득한 과거부터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다양한 용무를 봤다. 고대부터 숭산(崇山)을 신앙으로 삼은 민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산도 많거니와 대체로 산이 나지막하고 아기자기해 오르기도 쉽다. 이런 유순한 산세(山勢)는 오늘날까지 한국에 산행이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다.

역사서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에서도 등산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남긴 ’유산기‘와 화가들의 산 그림에서 보듯 산행이 더욱 활발했다. 학술적·군사전략적·유람적 성격의 산행이 잦았다. 암벽을 오르느라 용을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민화(民畵)까지 보여 흥미롭다.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의 산행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였다. 접근 경로도 열악하고 맹수가 들끓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산을 우주의 축약으로 본 거시적 자연관을 지닌 선비들에겐 산이야말로 생생한 체험을 해볼 만한 수신(修身)의 아카데미(academy·학교)였던 것이다.

’산림처사‘로 자처한 성리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의 ‘황소갈비 같은 산마루’를 열일곱 번이나 주파했으며,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지리산 탐승을 하다가) 초가지붕에 걸린 박처럼 죽은 송장이 되고 싶었다”고 쓸 정도였다.

평생을 일관해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그에게 지리산은 도심(道心)을 기르는 수련장이었다.

특히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청량산(淸凉山)을 ‘우리 집안의 산’, 즉 오가산(吾家山)으로 칭하며,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호 ‘퇴계’도 청량산에서 유래했다. 그의 ‘도산기(陶山記)’에 이같은 사실이 자세히 소개된다.

‘영지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陶山)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산이 두 번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산이라 이름하였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옛날 이 산중에 도기굴(陶器窟)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의거해 도산이라 하였다고 했다. (중략) 산 뒤에 있는 물을 퇴계(退溪)라 하고, 산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洛川)이라 한다. (후략)’ 여기서 도산서원과 퇴계가 유래했다.

대학자인 퇴계는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다”고 탄식하면서 산에서 배우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자 했다. 산을 유람하는 일이란 결국 인생 공부라 판단했던 것.

어쨌든 우리 민족의 ‘산사랑‘은 유별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가위 추석에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아 코로나에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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