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래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 조용래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투데이코리아=조용래 편집국장 | 누구에게나 수시로 찾아오는 슬픈 일이 있다. 타인의 슬픔까지 공감하며 살 마음이 없어도, 종종 느끼는 대부분의 슬픔은 나와는 상관없던 남들의 인생사에서 시작한다. 내 잘못이 아님에도 누군가의 슬픈 일을 보며 함께 슬퍼지는 것은 감정 전이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같은 종족에게 느끼는 연민, 미안함, 안타까움, 사랑 같은 감성 산물이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마치 나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마음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예수님도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이라 하시지 않았던가. “긍휼히”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엽게”다. 적든 많든 사람은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이 적게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이런 감정 능력을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 이 능력의 유무에 따라 반 사회성 범죄의 판단 기준이 되고, 남의 일에 지나치게 참견하는 성가시고 오지랖 너른 이웃도 된다. 공감 능력이 충전된 사람은 확실히 매력이 있다. 의리와 충성심이 있어서 친구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고 그저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이 정말 의리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언할 순 없지만, 가장 강력한 연대와 결집력으로 뭉쳐진 집단은 조폭이다. 조직 밖으로는 한없이 잔혹할지언정 내부의 식구들에게만큼은 지상 최고의 ‘집단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의 유전자에 깊이 뿌리내린 의리와 충성심이 범죄와 부패의 본질 중 하나기도 하다. 하지만 공감 능력을 진정 극한으로 끌어올린 집단은 검찰이다. 그들은 대놓고 동일체다.

스스로 돌아보며 감시할 수 없는 조직에선 ‘끼리끼리’ 공감 능력이 발휘된다. 내부에 범죄자가 생겨도 철저하게 덮어야 한다. 자신을 선이라 정의 내린 조직은 무오류 집단이기 때문이다. 내부 비리를 발설한 배신자는 끝까지 찾아내 조직의 쓴맛을 뼈에 새겨주어야 이탈자가 생겨나지 않는다. 내부자의 범죄는 철저히 숨긴다. 드러난 범죄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덮는다. 집단 결속력을 지켜야 하고 실패 사례를 남겨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면 서둘러 사표를 받는다. 변호사로 돈 벌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의 범죄는 곧 나의 범죄가 되지만,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직을 위해 한 일이어서 죄의식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공감 능력, 이것이 없으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우받기조차 어려운 그야말로 시대의 요구다. 하지만 방향을 자칫 잘못 겨누거나 지나치게 많게 되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나을 것도 없다. 딱딱한 아저씨들까지 눈물을 쏙 빼게 만드는 영화에는 유독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작품이 많다.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공감 능력 비뚤어진 그는 기러기아빠다. 폭력으로 얼룩진 무뢰한 삶에 진심이었던 그는 영화의 제목처럼 깡패들의 <우아한 세계>에 도달했다. 그는 오늘도 거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는 외국에서 유학 중인 자식들의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철철 흘린다. 우느라 먹던 라면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장면을 볼 때면 그의 깊은 부성에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연기를 통해서 그는 공감 능력이 충만한 사람임을 증명했다. 물론 내 자식들에게만이지만.
 
집단 내부에만 공감하고 외부로부터의 통제를 거부하는 집단이 국민의 인권을 지킬 수는 없다. 통제된 상황에서의 사격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의 실탄 발사는 오발이다. 모든 오발은 사고다. 이 사고는 전쟁터도 아닌데 대부분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공감 능력이 없어서만 생기는 건 아니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꿈속에서 책임이 시작된다(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고 했다. 미안함, 부끄러움이나 책임감 같은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 감정은 꿈속에서도 느낀다. 꿈에도 꿔야 할 꿈과 꾸지 말아야 할 꿈이 있다면, ‘독립검찰’은 애당초 꿀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꿈이다. 역사를 일별해 본다면 성찰하지 못하는 권력기관이 꾸는 꿈은 국민에게 언제나 악몽이었다. 비록 집단 무의식 속에서 꾸는 꿈 일지라도, 제발 책임감 있는 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스스로는 아무 개혁도 하지 않는 검찰이 세상을 개혁하는 주체가 됐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우아한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권력의 시녀, 그 오욕과 불신의 시대를 건너뛰어 검찰이 권력의 본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 그중에서도 특히 검찰 권력은 민주적 절차 안에서 통제되어야 하고 반드시 국민에 의해 감시받아야 한다. 검찰은 의회의 수사권 조정안에 반대하고 나서기 이전에 조직 내부와 개인의 비뚤어진 공감 능력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권력기관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스스로 못하면 누군가 도와서라도 해야 한다.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공감하는 능력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심히 살펴야 하는 약자, 소수자, 피해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 공감하기 어렵다면,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 폴 블룸 교수의 저서 <공감의 배신>을 참고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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