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무력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실탄 분배? 사실 아냐’
조사위 "머리·가슴에 총격 135명 사망·300여명 부상"
후유증 환자 분석 결과, 5월 18일 이후 피해 증가

▲ ▲ 16일 안길정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 조사4과장이 '2023년 5·18조사위 대국민 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진민석 기자
▲ 16일 안길정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 조사4과장이 '2023년 5·18조사위 대국민 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진민석 기자
투데이코리아=진민석 기자 | 올해 공식 조사를 종료하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발포했다”고 발표했다.

16일 조사위는 종로구 사무실에서 열린 보고회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작전 수행 중이던 계엄군은 저항 능력이 없거나 시위와 무관한 다수 민간인을 진압 과정에서 학살했다”며 “광주·전남 지역의 계엄군 진압 작전을 재구성하고 총상에 의한 사망자·부상자를 지도상에 표기해 분석한 결과”라며 이렇게 밝혔다.

특히, 당시 광주지방검찰청이 사망자 검시보고서에 ‘총상’을 지우고 ‘타박사’라고 기재하는 등 사인 조작에 가담한 정황도 보고했다.
 

계엄군 측 주장과 다른 당시의 만행들

이날 조사위는 전두환 신군부가 그간 피력했던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무력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실탄이 분배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지난 1995년 작성된 검찰의 수사기록에 따르면 계엄군이 ‘집단발포가 이뤄진 21일 오후 1시 이전에 실탄이 분배되지 않았으며, 시민들의 차량 돌진공격을 받은 계엄군 측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철수하는 31사단 경계병력들로부터 실탄을 넘겨받아 가까스로 발포할 수 있었다’고 적혀있다. 

조사위는 수사기록에 대해 반발하며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쯤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 장갑차 돌진 이후 이뤄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전(20일 야간)에 이미 일부 병력에 실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을 현장에 있던 계엄군의 진술과 현장 사진 등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안길정 조사4과장은 “진압 작전 현장에 파견된 3여단대대장 김모 중령은 5월20일 야간에 작전참모를 통해 여단장으로부터 실탄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며 "작전참모가 ‘여단장이 상부에 보고했으니 기다려달라’고 한 후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니 실탄을 지급하겠다’라고 한 대답을 김모 중령이 들었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이어 "특히 장갑차 기관총 사수로부터 장갑차 기관총에도 하루 전인 5월 20일부터 실탄이 장착돼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시 대대장의 체험수기와 1995년 검찰 진술, 그리고 현장 취재기자들의 증언을 통해 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에서 공수부대가 흩어져 횡대로 '앉아 쏴'와 '서서 쏴' 자세로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격했음을 확인했다"며 의도적인 발포라고 해석했다.

조사위가 계엄군 진압 작전을 재구성한 결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전남 일대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회 이상의 계엄군 발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공격헬기인 코브라(AH-1J)에서 20㎜ 발칸 연습탄 사격이 이뤄진 정황도 나왔다.

조사위는 지난 3월 헬기 사격 피탄 추정지인 광주 조선대학교 절토지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코브라 헬기에서 사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칸 탄두를 발견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 탄두가 20㎜ 연습 탄두임을 재확인시킨 바 있다.

이는 당시 헬기 조종사들이 지금껏 주장한 것과 불일치하는 대목이다.

앞서 지난 2021년 9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死者) 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에 출석한 헬기 조종사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도심에서의 사격은 전무했다고 부인했다.

이들 조종사는 무장한 채 광주로 출동했으나 기관총에 탄약을 장착하지 않고 싣고만 다니며 정찰·수송 업무를 주로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기관이 주고 받은 문서에서도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유추해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있어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2017년 기밀 해제된 백악관 상황실 기밀 문건 중 5·18민주화운동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대사가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대 의과대학 옥상에서 두 대의 자동화기를 발사하는 폭도들의 공격에 맞서 방어 중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음. 폭도들이 머리 위의 헬리콥터를 향해 발포하는 중이라고 보도되었음(Paratroopers were said to be defending against rioters who were firing two automatic weapons from the roof of Chonnam medical college. Rioters were reported firing on helicopters overhead)”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당시 헬기가 시민군들을 향해 사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대목이다.
 

현재진행형인 그날의 고통

조사위에 따르면 계엄군의 첫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께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이어 20일 오후 11시께 광주역 인근에서 발포가 이뤄졌고, 21일에는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도청 일원뿐 아니라 3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대 일원에서도 총격이 있었다.

그밖에 조선대 앞, 학동, 지원동, 송암동 등 계엄군이 배치된 대부분 작전지역에서 발포와 그에 따른 피해가 있었다.

이날 조사위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피해자들에 대한 현황도 공유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총 135명이며, 총상 부상자는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머리와 가슴 등 치명적인 부위에 총격을 당했다.

특히 이날 조사위는 사망자들의 사망 경위, 원인, 장소, 날짜 등에 대한 세부적 조사를 시행한 결과, ‘저항 능력이 없거나 시위와 무관한 다수의 민간인’도 계엄군의 폭력 진압에 사망한 점도 확인했다.

사망자 중에는 14세 이하의 미성년자가 8명, 여성이 12명, 장애인과 60세 이상의 노령자 5명이 포함됐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몸 안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지 못한 채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있다.

장애 9등급 이상의 중증 피해자들을 분석한 결과, 5월 18일 이후 날짜가 지날수록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모한 것으로 나타났다.

5월 18일 부상자 442명 중 44명(10%), 19일 부상자 431명 중 58명(13%), 20일 부상자 308명 중 59명(19%), 21일 부상자 346명 중 108명(31%)이 장애 9등급 이상의 중증 장애를 얻었다.

이어 당시 광주지방검찰청이 총상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의 사인을 조작하려 한 정황도 발견했다.

조사위는 “5월20일 사망한 김안부씨, 김경환씨는 최초 사체검안서에서 총상으로 기재됐으나, 광주지방검찰청이 작성한 ‘광주사태변사체 검시보고’에는 총상 내용이 사라지고 타박사로만 기재됐다”며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재조사를 의뢰해 의혹을 해소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 외에도 조사위는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인권탄압까지 서슴없이 벌인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 아래 피해자 단체를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시키는 이른바 ‘비둘기 공작’이 실행됐고, 강경파에 대한 지속적인 사찰과 불법감금, 납치행위 등이 자행됐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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