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자동차가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대거 바뀌면서 전자부품의 오작동으로 인한 급발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1886년 내연기관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후 약 100년간은 급발진 사고가 없었다. 그러나 자동차에 컴퓨터가 장착되면서 급발진 의심사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동변속기가 사라지고 자동변속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급발진 의심 사고도 늘어났다.
 
운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차량이 갑자기 가속되는 현상인 급발진 의심 신고는 지난 2010년부터 2022년까지 766건에 달한다. 급발진 사고는 큰 인명 피해로 이어져 여러 차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하지만 매년 수많은 급발진 사고가 신고되는데도 그 원인은 아직까지 불분명한 상태다.
 
최근 들어 법원 1,2심, 특히 형사사건에서 급발진으로 인정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차량결함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다만 2018년 5월 호남고속국도 인근에서 발생한 BMW 차량의 급발진 사건이 항소심까지 승소해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대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행 제조물 책임법의 탓이 크다. 피해자가 제조업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요구하려면 제품의 결함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하도록 이 법은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가 이를 입증하려면 고도의 기술력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제조사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하는 점을 감안할 때 소비자가 제품결함을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자동차의 두뇌 격인 전자제어장치(ECU)를 비롯해 주행기록장치(EDR) 등의 오작동 결함을 소비자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대법원은 급발진을 이유로 대우자동차 운전자 42명이 1999년에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한 소송 판결에서 “급발진 사고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다고 해서 그 자동차가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안전성을 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히고 “자동차 공학상 운전자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급발진이 일어나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지금까지 민사 사건의 중요 판례로 인용되면서 급발진 사건에서 제조사가 유리한 판결을 받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급발진 사고를 보면 갑자기 자동차의 엔진 회전수(RPM)가 폭증하면서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내달린다.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으며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30여 년 운전경력자, 택시 운전자 등 운전 베테랑들이 경험한 일인데도 차량 제조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법 규정도 운전자에게 기술적 결함을 입증하라고 한다.
 
목격자 없이 교통사고가 난 경우, 사망자가 신호 위반 등 법규를 위반해 사고가 났다고 생존자가 주장하면 블랙박스가 없는 경우 이를 반박할 방법이 없다. 급발진 사고도 이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강조되면서 급발진 의심 사고 때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따라 입증 책임을 제조사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에서 처음 논의됐다.
 
그러나 해당 법안을 두고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실상 반대 의견인 ‘신중 검토’ 의견을 내면서 개정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공정위는 소비자 권익 보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소송을 건 측이 피소송자의 잘못에 대한 근거를 입증해야 하는 소송법의 일반원칙에 위배된다 면서 법체계와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급발진 사고로 제조사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일이 흔하다. 2013년 10월 24일(현지 시각) 미국 오클라호마주(州) 1심 법원은 일본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로 숨진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에게 3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법원이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업체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 판결이 처음이다.
 
미국 법원이 제조사의 결함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는 달리 특별한 사건일 경우 예외적으로 소송을 건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 이를 입증하도록 제조물 책임법의 입증책임 번환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42개 주에서 이 예외조항이 인정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피해자가 오롯이 급발진 여부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더 이상 방치돼서는 안되겠다. 다들 급발진이 분명하다는 사고로 인해 동승자가 사망하고 운전자 자신도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오히려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입건됐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급발진 시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걸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예방책이다. 미국과 일본의 일부 차량 제조사들은 전자제어 엔진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엔진 작동을 인위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킬(kill) 프로그램을 설치해 급발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고 한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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