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선거철이 아닌데도 행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어지럽게 걸려있는 ‘정당 현수막’ 때문에 지방자치단체들이 골치를 썩이고 있다.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도 버젓이 걸려있다. 도시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도를 넘은 비방성 문구로 ‘정치 혐오’를 조장한다. 현수막을 선택해서 볼 수도 없으니 시민들은 짜증과 함께 피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정당 현수막이 이젠 공해 수준을 넘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정당 현수막은 지난해 12월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난립하기 시작했다. 여야 의원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은 사전 신고나 허가 없이도 15일간 수량이나 규격, 게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정당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개정됐다. '통상적인 정당 활동으로 보장되는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설치하도록 돼 있으나 대부분 누군가를 반대하거나 비방하는 문구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니 정치 혐오를 일으킨다. 심지어 정당 현수막 난립으로 보행자와 운전자의 안전이 위협받는가 하면 일부 자영업자들이 영업 방해까지 받는 일까지 생긴다.
 
이러니 정당 현수막 관련 민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옥외광고물법 시행 전 3개월 동안(지난해 9~12월) 전국에서 제기된 현수막 관련 민원은 6415건이었으나 시행 후 3개월(올해 1~3월)간은 1만4192건에 달해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행인이 현수막에 걸려 넘어지거나, 현수막이 차량 운전자의 시야를 가려 가로등과 충돌한 안전사고도 8건이나 보고됐다.
 
민원이 급증하자 서울, 부산, 인천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지난 3월 정당 현수막의 수량과 설치 장소를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은 옥외광고물법 개정 의견을 행정안전부에 건의했다. 행안부는 5월 8일 정당 현수막의 설치 장소와 위치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위반할 경우 강제철거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당 현수막 설치·가이드 라인’을 마련, 시행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정당 현수막들의 난립은 여전하다.
 
참다못한 인천시는 옥외광고물 조례를 개정, 정당 현수막을 지정 게시대에만 걸도록 하고 설치 개수를 국회의원 선거구별 4곳 이내로 제한했으며 혐오·비방 내용을 게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인천시는 이 조례를 한 달간의 계도·홍보 기간을 거친 뒤 6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7월 13일부터는 전국 최초로 위반 현수막에 대한 강제 철거에 들어갔다. 그러자 행안부는 인천시 조례가 상위법인 옥외광고물법과 충돌한다며 법원에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인천발 정당 현수막 철거는 다른 지자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인다. 경기도 광주시는 정당 현수막의 난립을 막기 위한 개정 조례안을 입법 예고하고 의회 의결을 거쳐 9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울산시도 8월까지 정당 현수막만 전용으로 걸 수 있는 지정 게시대를 별도로 설치하고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은 강제 철거하기로 했다. 지자체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민들의 원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또한 각 정당과 지구당 위원장은 마음대로 현수막을 걸 수 있지만, 정치 신인들은 현수막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 없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일각에서 현행 옥외광고물법에 대해 위헌 소지를 지적하는 이유다.
현수막을 철거해 이를 처리하는데 막대한 세금이 들어간다. 환경부에 따르면 올 1~3월 정당 현수막을 포함해 전국 지자체가 수거한 현수막은 200만 장으로 1천 300t에 달했다. 2022년 대선 때 1천 100t보다 많았다.
 
폐기 비용을 국민의 혈세로 충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철거된 현수막은 재활용이 어려워 대부분 소각된다. 현수막은 석유에서 추출된 폴리에스터로 만들어져 현수막 1장(규격 10㎡ 기준)을 만들고 태우는 과정에서 4㎏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올해 1분기 지자체가 게시 기간이 만료됐다는 등의 이유로 철거한 정당 현수막의 제작과 처리 과정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양 만해도 무려 4,800t에 달한다. 지자체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양까지 계산하면 1만t은 족히 넘어갈 것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당 현수막의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문구도 점점 더 과격해질 것이다. 진흙탕 싸움에 익숙한 정당들에 자율적인 절제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정당 현수막을 둘러싼 논란은 대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은 인천시 등 지자체의 조치에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는 상황을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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