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얼 본받아 갈등과 분열 넘자

▲ 류석호 교수
▲ 류석호 교수
올해 78주년을 맞는 광복절(光復節)의 화제는 단연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아닐까 한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로 이어진 혹독한 시기에 자수성가로 일군 막대한 부를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바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지사 부부가 100여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 합장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지난 8일 키르기스탄에서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 국내 봉환이 이루어졌고, 최재형 선생의 유해를 찾지 못해 러시아 우수리스크 순국 장소(추정)와 최재형기념관에서 가져온 흙(3kg)을 어제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 부인의 유해와 합장하여 마침내 묘 복원이 성사된 것이다.

정부는 광복절 전날인 14일 ‘백 년만의 해후(邂逅),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부부 합장식을 거행했다. 최 지사 순국 후 키르기스스탄으로 유배된 뒤 현지에서 생을 마감한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1880∼1952) 여사의 유해는 70여년 만에 국내로 봉환됐다.

사실 자신이 어렵사리 모은 모든 재산과 생명까지 조국과 민족에 헌신한 최재형의 정신을 알리고 훌륭한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정부가 늦게나마 이런 뜻깊은 행사를 마련한 것은 크게 상찬할 만한 일이다.

국가기간방송인 KBS(한국방송)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代父)’로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독립운동을 배후 지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 선생의 삶을 조명한 광복절 기획 다큐 ‘시베리아의 페치카, 최재형’을 제작, 지난 12일 방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페치카(pechka)는 방안의 벽에 돌이나 벽돌 따위를 붙여서 만든 러시아풍의 난로로써 최재형 선생의 별칭이 ‘페치카’인 것은 그가 연해주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가들에게 따뜻한 난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번 다큐는 광복 78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의 위국헌신의 삶을 선양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마련됐다는 것이 KBS측 설명이다.

최재형 선생의 일생은 한마디로 극적(劇的)인,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기적같은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불세출의 위인이자, 불꽃같은 삶을 산, 넘치는 활동력과 에너지를 갖춘 열정가였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나 아홉 살 이던 1869년 일제의 압제와 지독한 가난을 타개하려는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한 연해주 한인 1세대. 11살 되던 1871년 형수의 차별대우와 자신에 대한 증오 등을 이유로 가출, 혼자 정처 없이 무작정 걷다가 정신을 잃고 해변가에 쓰러졌다.

이때 그를 발견한 러시아 상선 선원들의 구조로 러시아 상선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선 선장의 호의로 선원으로서 심부름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러시아 선장의 도움으로 그의 양자가 된 뒤 상선을 타고 두 번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상업에 눈을 떠, 농업과 군납업 등으로 거부(巨富, 백화점 등 수백 억원의 재산)의 반열에 오른 사업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였다.

최재형 선생은 일제 침탈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은 한인들을 위해 32개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대동공보 등 한글 신문을 발행해 한인들의 지위 향상과 독립운동가들의 정보 교류의 창구를 제공했다.

특히 1911년 5월 설립한 권업회(勸業會)는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권업회(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는 외견상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면서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됐다. 일제와 러시아 당국의 탄압과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권업회란 명칭을 쓴 것.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사불란한 조직을 통해 강력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효과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기관지 ‘권업신문’까지 발행했고, 회원이 9천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안중근·홍범도 등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와 의병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기관총 등 체코 및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해 공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주 한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그동안 다져놓은 신뢰와 인맥을 십분 활용, 러시아 정부를 설득하는 협상에 나서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러시아 정부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항일투쟁 영웅이기도 하다.

1920년 일본군이 연해주 우수리스크를 급습, ‘4월 참변’(300여명의 동포 학살)을 일으키면서 최재형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암매장으로 시신을 찾지 못함.)

당시 가족의 안전을 우려해 주위의 권고를 뿌리친채 피신하지 않은 최재형 선생은 “내가 도망하면 너희 모두 일본군 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는 더 살아야 한다”며 자진해서 일본군에 끌려갔다. (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1907년 연해주에 온 안중근이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그는 연해주 이주 한인들의 든든한 후견자요 대부였다.

실제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직전 여러 날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했고, 최 선생으로부터 권총과 여비 등 자금을 지원받았다.

안중근의 거사를 돕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의 동선(動線) 정보를 알아내 알려준 것은 물론, 거사 후 모친 조마리아 여사 등 안중근 의사 가족을 여러모로 보살핀 것도 그였다.

최재형 선생의 독립운동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본격화됐다.

1908년 국외 최대규모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설립해 총재가 됐고, 연추(煙秋·추카노보 일대) 의병을 조직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으며,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있게 한 산파역이자 숨은 공로자였다. 안 의사는 동의회 의병대의 참모중장(우영장·右營將) 이었다.

한일병탄 이후에도 홍범도·이동휘·김립 등 백두산 일대 항일 무장투쟁을 지원했고, 1919년 연해주에서 발족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보다 한 달 빠르다) 재정 지원도 도맡았다.

최재형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재경부 장관)에 추대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20년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연해주 일대에 벌어진 ‘4월 참변’ 당시 체포돼, 정식 재판도 없이 일본군에게 총살당해 순국, 현재까지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

일제 침탈로 인한 국권 상실과 혼돈의 시기, 일찍이 연해주로 이주해 세계를 돌아보며 국제적 안목을 키우고, 오늘날 가치로 수백억대 재산을 모은 거부였으나 전 재산을 당시 한인들과 독립운동에 바치며 위국헌신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은 올해 순국 103년을 맞았다.

러시아라는 지역적 한계와 최재형 선생의 후손들이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 이주된 상황,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관계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여건 등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이름과 공적이 오늘까지 전해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최재형 선생은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의 길에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로, 이주 한인들의 어려운 삶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잘 살기 위해 노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선한 사업가였다.

압제와 혼돈의 시기에 좌절하지 않고 위국헌신으로 공헌한 최재형은, 오늘 그를 다시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베리아의 페치카’를 넘어 ‘독립의 꿈을 키운 진정한 대부’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생은 용의과감(勇毅果敢)의 인(人)이며 기(己)를 희생하야 동족을 구제하랴는 애국적 의협적 열혈이 충일하는 인격자요 겸하야 성(誠)으로써 인(人)과 사(事)를 접(接)하야 민중의 신뢰와 존경을 박(博)하던 이라.”

- 선생에 대한 추모 기사(독립신문 1920년 5월 15일자) -
 
최재형 선생과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7년 전 여름,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항을 왕복하는 4박 5일 크루즈여행 ‘연해주 역사탐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을 비롯해 우수리스크 시내 최재형 선생 고택, 수이푼 강변 이상설 선생(헤이그 밀사) 유허비와 발해유적지 등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불굴의 독립정신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연해주 역사탐방을 하기 전엔 솔직히 최재형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의 배후인물이라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분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고도 놀라웠다. 여행 후 최재형 선생 관련 서적과 기록물, 시베리아의 벽난로라는 뜻의 '페치카' 뮤지컬 등을 보았다.
 
최재형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힘쓴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선생은 한인 동포들에게 '페치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분의 업적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찡해졌다.
 
특히 5년 전엔 ‘K문화독립군’을 표방한 전문예술단체 ‘랑코리아’를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유학파 출신 성악가 주세페 김(김동규, 테너·예술감독)-구미꼬 김(김구미, 소프라노) 부부가 제작·출연한 뮤지컬 ‘페치카’를 관람하면서 최 지사의 나라와 겨레 사랑을 생생하게 체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 부부는 “윤봉길의 배후에는 김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지만 안중근의 배후에 최재형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최재형의 삶을 재조명하고 고려인을 비롯한 해외의 많은 독립운동가 자손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전하기 위해 뮤지컬을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각종 공연장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특히 학생 등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공연 등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다.
 
뮤지컬 ‘페치카’에서 올가 역을 맡아 아버지 최재형을 증언하는 내레이터로 등장, 뮤지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간 국악인 김성녀(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씨는 “잊힌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시련의 삶을 펼쳐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한편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되찾은 광복(光復)의 기쁜 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건 왜일까.
 
1945년 8.15 해방에 이어, 정확히 3년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이룩한 자유 민주 공화의 나라! 비록 외세에 의한 남북 분단(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과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완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들의 그간의 분투와 성취는 실로 경이롭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국토, 여러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지도자와 국민이 ‘위대한 각성’과 함께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통해 원조를 베푸는 선진국으로 도약한 자랑스런 나라!
 
그럼에도 우리의 ‘진정한 광복’은 아직 요원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제는 남과 북의 갈등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이념, 정치, 남녀, 세대, 노사, 빈부, 지역 등 각종 분열과 갈등으로 쪼개지고 나뉘어 78년 전 광복의 기쁨은 온데간데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세상을 비관하면서 아무 이유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흉기를 휘두르는 ‘묻지마 칼부림’이 대로변에서 일어날 정도로, 모두가 뾰족하게 날이 서 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배척하려는 마음만 가득해 일어난 불상사다.

막 끝난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전북 새만금 일대)의 난맥상(亂脈相)은 어떤가. 안전불감증, 안일 행정,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준비부족과 위기관리능력 부재, 온갖 엇박자와 무능한 대처 등 153개국 4만 3000여명의 참가 청소년은 물론 전세계에 ‘한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것 같아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사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 여야가 서로 ‘네탓’이라며 책임공방을 벌이는 꼴별견이란...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신의 맡은 바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챙기고 수행하는 기본에 충실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정말 한국인의 고질병인가.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광복 이후 꾸준히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내부에서 이루어야 할 ‘광복’이 여럿이다. 가장 큰 내부의 광복은 앞서 지적했듯 지역·이념·정치·세대·남녀·빈부·노사간 분열과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정치는 국가와 국민을 평안하게 해 주는 활동인데 오히려 앞장 서 갈등을 부추긴다. 거리에 난잡하게 걸린 욕설 같은 현수막을 보면서 우리의 광복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현수막을 볼 때마다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은커녕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짜증이 앞선다. 하물며 남북간의 갈등을 넘어 통일된 대한민국을 말한다는 것은 먼 이야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진정한 광복은 내부의 지역과 이념, 세대와 빈부의 갈등에 빠진 우리가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외부의 광복은 외부의 힘이 필요했지만 내부의 광복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광복의 달 8월, 우리는 피 흘린 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일은 국가도 국민도 같이해야 한다. 너와 나, 여야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지도층부터 뼈저린 성찰을 통해 현실을 직시, 내로남불 이기주의와 작별하고 ‘우리 함께‘라는 공동체의식, 연대와 협동의 두레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얘기다. 솔선수범과 환골탈태가 화급하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최재형 선생과 같은 숱한 애국선열들이 온전히 자신을 던져 조국 광복의 길에 나선 까닭을 곱씹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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