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서민들이 높은 물가와 금리 부담 등으로 생활비가 부족해지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갑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눈물을 머금은 채 보험을 해지하거나 보험료를 제 때 내지 못한 서민들이 급증, ‘해지.효력상실환급금’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 9월 기준, 생명보험사 해약·효력상실 환급금은 35조 6682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5조151억 원(16.4%)이나 증가했다. 이같은 추세로 미루어 올해 연간 해약환급금 규모도 역대 최고를 기록했던 지난해의 44조 3719억 원을 넘어서 신고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납입한 보험료 내에서 대출을 받는, 이른바 '불황형 대출'로 불리는 보험료 담보 대출(약관대출)도 올해 들어 23%나 크게 늘어났다.
 
보험을 깨는 건 가입자들에겐 막대한 손해다. 해지한 보험은 부활이 불가능해 무척 신중해야 하고 특히 만약의 위험에 대비한 보장성 보험은 가능한 한 유지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게다가 보험을 중도 해지할 경우 한 푼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납입 원금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만 돌려 받는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아무리 급전이 필요해도 예.적금부터 해약하고 보험은 맨 마지막에 행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보험 해지가 급증한 건 고물가와 경기 침체, 금리 부담 등으로 벼랑 끝으로 몰린 서민들이 많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보험의 주된 기능은 사고에 대비, 보험가입자를 경제적 파멸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오죽하면 손해를 감수하면서 보험까지 깨겠는가.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거나 얇아진 지갑 사정을 다소나마 호전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험을 중도 해지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제는 보험 해약과 약관대출이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경기 침체 등 복합위기로 저성장, 고물가, 고금리 현상이 당분간 지속돼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앞으로 물가가 둔화되겠지만 둔화 속도가 완만해 내년 말경이 돼야 2% 부근에 근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내년 경제성장도 올해보다는 나아지겠지만 성장률이 2% 초반 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3% 올랐다. 오름폭이 10월의 3.8%에 비해 다소 둔화됐다. 하지만 4개월 연속 3%대가 지속됐다. 3%대라고 하지만 체감 고통은 더 크다. 먹거리 물가상승 폭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대표 먹거리 지표인 외식 물가상승률은 전체 평균을 30개월 연속 웃돌았고 가공식품도 24개월째 상회 중이다.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도 8월 기준 437만 명으로, 1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장사가 안돼 아르바이트생조차 두지 못하는 곳이 이처럼 엄청나다는 얘기다.
 
어렵기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인 이상 기업 204개를 대상으로 '2024년 기업 경영전망 조사'를 실시한 결과 경영 계획을 수립한 기업 중 82.3%가 내년 경영 계획 기조를 '현상 유지' 또는 '긴축경영'으로 삼았다. ‘‘확대경영’은 17.7%에 불과했다. 자금 사정도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조사됐다. 내년 자금 상황이 ‘어려울 것’이란 응답(53.5%)이 ‘양호할 것’이란 응답(46.6%)을 능가했다.
 
올해 부실 징후를 보인 기업도 지난해보다 25%나 늘어났다. 대기업·중소기업 구분 없이 모두 증가했다. 고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부담 증가로 연체 발생 기업 등이 늘어난 탓이다. 내년엔 미국 금리가 세 차례 인하될 수 있다는 등 ‘뉴 노멀’로 통했던 고금리가 점차 막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산업 현장의 불황의 그늘은 이처럼 싸늘하다.
 
한국은 이제 1%대, 잘해야 2%대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게 현실이다.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위기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소멸하고 있다’는 최근 뉴욕타임스의 경보음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저성장 기조를 부채질하는 저 출생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경제가 위축될수록 결혼과 출산 여건은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미국과 중국 간 공급망 갈등이 재차 고조되는 가운데 보호무역 장벽이 다시 높아지고 자원 무기화가 거세지는 등 무역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이젠 진지하게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곱씹어봐야 한다.
 
일본이 30년간 제자리걸음을 한 건 혁신 부재의 탓이 크다. 정보기술 혁명에 이어 빅 테크 혁신에 뒤처지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만 것이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제반 경제 상황과 전망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겠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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