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늘린다는 정부 발표 이후 후폭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공.자연계 상위권 지원자들의 의대로의 쏠림 현상 심화가 우려되면서 ‘이공계 몰락'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또한 지방권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선발 인원이 지금보다 갑절로 늘어날 것이라는 추정으로 중·고교생의 '지방 유학' 쇄도도 점쳐지고 있다.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N수생'이 크게 늘어나고, 초등생 의대 입시반 등 사교육이 가열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학원가에서는 벌써부터 의대 입시설명회를 갖거나 야간반 증원을 고민하는 등 '의대 특수'가 부는 분위기다.
 
정부는 내년 입시부터 의대 정원을 현재의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4%나 대폭 늘리고 지역인재전형 의무 비중을 현재의 40%(강원, 제주는 20%)에서 60%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학교별 정원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오는 4월 중하순까지 학교별 정원 책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하지만 정부 발표대로 정원 2000명 확대'와 지역인재전형 비중 60%라는 조건을 대입할 경우 지역인재전형 선발인원은 기존 1068명에서 2배 가량인 2018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지방권 의대가 지역인재전형 비중을 60% 이상으로 높일 경우 선발 규모는 더 커지게 된다.
 
지방권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경쟁률은 수도권보다 훨씬 낮고 커트라인도 상대적으로 낮다. 지역인재전형에는 해당 지역에서 고등학교 전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만 지원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4학년도 입시의 경우, 지방권 27개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경쟁률은 10.5대 1로, 전국단위 선발 전형 29.5대 1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로 미루어 지역인재전형을 노리고 중학교 때부터 '지방 유학'을 떠나는 학생이 쇄도할 가능성이 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이번 의대 정원 확대로 의대의 정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커트라인은 4.5점 하락할 것으로 추정된다. 수능 문제가 1개당 2~4점인 점을 감안할 때 지금은 4~5문제 이상 틀리면 지방의대를 갈 수 없으나 내년부터는 1문제 정도 완화된다는 얘기다. 이로 인해 최상위권 대학인 서울대·연세대·고려대(SKY)의 이공.자연계 일반학과 91개 중 의대 지원이 가능한 점수대 학과는 62개(68.1%)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상위권 대학의 공학·과학 계열에서 자퇴해 의대에 다시 도전하는 ‘N수생’이 크게 늘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더구나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고 있어 이공계 공동화 우려가 크다.
 
이공계 대학의 인재 유치난은 학생 자신의 미래는 물론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생겨난 이공계 기피 현상은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따라서 이번 조치로 학업능력이 뛰어난 수험생들의 이공계 진학을 아예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의료계보다 과학계와 산업계다. 고령화와 필수.지역의료 붕괴로 의사 증원이 시대적 과제로 떠 오르긴 했지만 질 좋은 과학인력 육성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이다. 물론 이제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이 단 1명도 나오지 않은 것은 개탄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 운명이 첨단기술 확보와 연계돼 있는 오늘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4차산업 분야에서 질적·양적으로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은 더 화급한 문제다.
 
우리나라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3.7명에 크게 못 미친다. 이로 인해 의사 1명이 한해 진료하는 평균 환자 수가 6113명이나 된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1차 의료 진료시간 평균은 고작 4.3분으로 OECD 평균 16.4분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는 2000년 의약 분업 때 돈벌이 감소를 우려한 의사협회의 국민 생명을 볼모로 한 파업에 정부가 굴복, 3507명이던 의대 정원을 2006년까지 3058명으로 449명이나 단계적으로 줄인 뒤 지금까지 무려 18년간 줄곧 동결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의대 증원에 국민 상당수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지만 필수·지역의료를 살리자는 이유가 크다. 의사 수를 크게 늘리더라도 지금처럼 의사들이 벌이가 좋은 미용 의료분야 등과 수도권으로만 몰려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 ‘수도권 원정 진료’, 수술 대란 등을 야기하는 필수의료 부족 사태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등을 돌릴 것이다.

갑작스러운 증원을 의대, 특히 지방권 의대가 감당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의학계에서는 비수도권 의대 교수들의 이탈로 현재의 교육 수준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지방 의대의 교육과 수련 역량을 강화하는 대책을 병행하지 않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고 결국 환자들만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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